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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YPRF(청년혁명전선)사령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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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나 생각하기 전에,
국가가 내게 무슨 짓을 했더라?</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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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8 Aug 2008 23:47:4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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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YPRF(청년혁명전선)사령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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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werwolf-나치가 남긴 망령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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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전세가 자신들의 패배로 기울때, 국가는 자신이 운용가능한 모든것을 총동원해 마지막 역전을 시도하곤 한다. 1944년후반기의 독일도 사실상 패배가 임박했던 까닭에 이런시도가 쏟아져 나왔다. 보복병기들과 그에 대한 프로파간다들, 국민척탄병, 볼크슈트름등등, 그 수많은 시도중에는 연합군점령지역에 대한 게릴라전 수행계획인 베어볼프도 있었다.<br><br>베어볼프의 기원은 1944년으로 올라간다. 그해 9월, 연합군의 동과 서 양쪽에서 서서히 다가오자, 하인리히 히믈러는 히틀러 유겐트 단장 아르투어 아흐만, 소련점령지 치안 책임자 한스 아돌프 프러츠만, RSHA 총책 에른스트 카르텐부르너,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 오토 스코리체니와 함께 독일본토 방어계획을 위한 회의를&nbsp;가졌다.&nbsp;<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8fea684449.jpg" width="414" height="59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8fea684449.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8fee03f487.jpg" width="273" height="37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8fee03f487.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003002304.jpg" width="250" height="36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003002304.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8ff1f5edec.jpg" width="245" height="37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8ff1f5edec.jpg');" /></div>&lt;맨위 부터 히믈러와 한스 아돌프 프러츠만, 아르투어 아흐만, 오토 스코르체니, 에른스트 카르텐부르너&gt;<br><br>그리고 회의 결과, 이후 독일본토가 연합군에게 점령되었을때, 게릴라를 양성해 점령지역에 투입, 게릴라전을 수행한다는 계획,베어볼프계획이 수립되었고 총 책임자에 프러츠만이, 국방군과 히틀러 유겐트에서 병력을 차출해 훈련시키는 제반사항은 오토 스코르체니와 그의 그의 사냥팀이 맏게되었다.프러츠먼은 동부에서 대 게릴라전에 이골이났던 양반이었던 만큼, 게릴라전에 관해선 나름 권위자였으며, 오토 스코르체니는... 무슨 설명이 따로 필요하겠는가?<br><br>베어볼프에 대한 훈련은 라인강 유역에 자리잡은 Hulchrath성에서 진행되었다. 성은 베어볼프의 총사령부로도 사용되었고 덤으로 서부지역 치안총책인 칼 구텐베르거의 사령부이기도 했다. 1944년 11월 말, 처음으로 200명의 히틀러 유겐트단원 출신의 자원자들이&nbsp;성에 도착했고 화기운용법, 독도법, 폭발물... 그외에 게릴라전에 필요한 훈련들을 스코르체니가 이끄는 무장ss, 국방군, 게슈타포 교관들로부터 교육받았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00f679280.jpg" width="480" height="36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00f679280.jpg');" /></div>&nbsp;<br>후에는 히틀러 유겐트뿐만 아니라, BDM(독일여성동맹)에서도 자원자를 받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유겐트건 BDM이건 모두 기본적으로 소총이나 권총, 판저 파우스트를 쏠수있는 훈련을 받은 상태였다는것이다. <br><br>베어볼프의 조직은 계속확대되었고 그에 대한 지원도 늘었다. Hulchrath성에 이어 베를린교외와 바바리아지방에&nbsp;'알프스요새'라고 명명된 베어볼프훈련캠프가 설치되었고, 아이펠과 바바리아지방에 베어볼프를 위한 벙커들이 배당되었다. 벙커들에는 충분한 양의 식량과 탄약이 상비되었는데 연합군이 이지역을 점령했을때 야간에 공격을 가하고 낮에는 민간인들속에 슴어드는 게릴라전을 위한 물자들이었다. 게슈타포는 이를위해 가짜 신분증까지 준비했다. <br><br>하지만 베어볼프의 조직이 비대해졌다고 마냥 좋은건 아니었다. 베어볼프의 조직이 커진만큼 다른 군사조직으로 가야할 자원이 베오볼프를 위해 돌려져야 했고, 이것은 국방군과 SS, 두조직은 뿌리 깊은 대립을 부추기고 말았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025696210.jpg" width="320" height="42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025696210.jpg');" /></div><br>결국 히믈러와 카이텔은 베어볼프의 지휘권과 그 가용자원을 두고 심한 의견대립을 보였고 덕분에 베오볼프는 사실상 와해된것처럼 보였다. <br><br>다 죽어가던 베어볼프를 살린건 괴박사였다.&nbsp;그는 베어볼프의 존재가 프로파간다에 꽤나&nbsp;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했고, 베오볼프조직에 대한 후원과 함께&nbsp;통제권장악을 시도하는 한편,1944년 3월 23일, 베어볼프 연설을 통해 "모든 독일인은 최후의 순간까지 싸울것이다."라고 말했다. 괴박사는 이어 베어볼프신문과 베오볼프 라디오방송도&nbsp;시작했다. 물론&nbsp;지고 있는 판국에 이런게 제대로 될일은 없지만.<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0480e0d88.jpg" width="315" height="47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0480e0d88.jpg');" /></div><br>그리고 괴박사가 베어볼프를 살려내던 비슷한 시기, 베어볼프는 본격적인 테러공작에 나선다. 반나치인사로 연합군이 점령한 아헨시의 시장으로 임명된 프란츠 오펜호프박사를 제거하기위한 작전 카니발 작전이었다.<br><br>벨기에와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아헨시는 1944년 10월 21일 연합군이 진주하면서 최초로 연합군에 의해서 점령된 독일 도시였다. 이후 연합군은 이지역의 반나치 인사인 프란츠 오펜호프 박사를 시장직을 권유했고, 10월 31일 박사는 이 귄유를 수락했다. 박사가 시장직을 맏은것은 연합군입장에서는 독일인들에게 자신들이 침략자나 정복자라는 이미지대신 해방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줄수있는 수단이었지만, 나치에게 있어선 그것은 비열한 배신에 불과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4f99e2644.jpg" width="500" height="392.77777777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4f99e2644.jpg');" /></div>(1944년 10월, 전투로 파괴된 아헨시가지.&gt;<br><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509d8ad81.jpg" width="200" height="25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509d8ad81.jpg');" /></div><br>&lt;프란츠 오펜호프박사&gt;<br><br>"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저 배신자를 죽여라!"<br><br>히틀러는 이 '국가의 반역자'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아헨은 그가 어떻게 할수없는 위치였다. 1945년이 되면서 더이상 독일군에게 공세란 불가능했고, 1945년 3월에는 연합군은 이미 벨기에 국경지역인 아헨을 지나 라인강변에서 전투중이었고 수세에 몰린 독일군이 갑자기 공세 나서서 아헨을 점령하고 프란츠를 제거한다는 건... 지나치게 위험부담높은 모험이었다.<br><br>히믈러는 여기에 베어볼프라는 해답을 제시했다. 히믈러는 히틀러에게 잘훈련된 몇명의 베어볼프가 투입된다면 프란츠를 제거하는것은 어렵지 않다고 히틀러를 설득했다. 마침내 히틀러는 작전을 승인했고 프란츠 오펜호프박사를 제거하기위한 카니발 작전이 준비되었다.<br><br>작전의 지휘관에는 스코르체니의 사냥팀으로 베어볼프 교관을 맏고 있는 허버트 벤첼 소위가 임명되었다. 그의 부관에는 요제프 레이트게브 하사, 물자조달과 아헨 잠입시 길안내에는 BDM의 일제 히어쉬가 임명되었다. 허버트는 그밖에 유겐트 출신의 16세의 베어볼프 훈련병 에리히 모르헨슈바이츠를 차출하고&nbsp;국경순찰대 출신의 두명을 더 징발해 아헨까지의 길잡이로 삼았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5114230e5.jpg" width="500" height="375.23629489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5114230e5.jpg');" /></div><br>그리고 1945년 3월 20일, 모든 준비를 마친 이들은 독일군이 노획한&nbsp;B17폭격기를 타고 벨기에와의 국경지대로 향했다. 벨기에와의 국경지대에 착륙한 이들 6명의 베어볼프들은 순찰중이던 두명의 벨기에군을 사살하고 아헨시로 향했다.&nbsp;아헨시 인근에 도착한 이들은 리제를 정찰을 위해 아헨시로 먼저 파견했다. 리제는 타켓인 오펜호프박사의 거주지를 확인한뒤 돌아왔고 마침내 3월 25일 밤, 이들은&nbsp;박사를 제거하기위해 움직였다.&nbsp;<br><br>박사의 집에 도착한 그들은 전화선을 끊은 뒤,&nbsp;리제는 누가 오는지 망을&nbsp;보고 허버트와 요제프는 문을 두드렸다.&nbsp;<br><br>"예, 누구신가요?"<br><br>이제 막 옆집의 파티에 참가하고 돌아온 프란츠박사가 방문객을 맞이하기위해 문을 열었다.허버트와 요제프는 자신들을 부근에 추락한 독일공군 파일럿-어째 뻔해 보이는 거짓말....-이라고 소개하면서 독일군에게 합류하려고 하는데 어느쪽으로 가면 되냐고 프란츠박사에게 물었다. <br><br>프란츠박사는 이 방황하는 어린양들을 내비둘수없었는지, 그들에게 연합군에게 항복하라고 권했다. 그의 설득이 꽤나 유효했는지 허버트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제프는 틀렸다. 요제프는 소리를 지르며 총을 쐈다.<br><br>"하일 히틀러!"<br><br>요제프의 총에 맞은 프란츠박사는 그자리에서 절명했다. 암살자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망쳤고 총성을&nbsp;듣고 연합군이 박사의 집에 도착했을때 그들이 본건 집 바깥쪽에 쓰러진 박사의 시체였다. <br><br>허버트는 운이 좋아 도망칠수있었지만 요제프와 일제는 그렇지 못했다, 둘은 도망치던 도중 리제가 지뢰를 건드린 탓에 요제프는 사망하고 리제는 심한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br><br>종전후, 카니발작전에 참가했던 이들은&nbsp;허버트를 제외하곤 모두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어 1949년 아헨에서 재판받고 모두 1년에서 4년간의 형을 언도받았다.<br><br>뭐 종전후 얘기는 종전후 얘기고. <br><br>프란츠 오펜호프박사의 암살에 성공하자 나치스는 오랜 암흑끝에 승리의 서광이라도 본것처럼 난리 쳤다. 괴벨스와 보르만, 두사람이 돌아가며 프로파간다 방송으로 베어볼프를 추켜세우기 바빴고, 베어볼프에 대한 과장된 정보들이 쏟아져 나왔다.<br><br>연합군 정보국은 이 과장된 정보들을 필요 이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의 머릿속에 베어볼프의 알프스요새는 험준한 산속에 자리잡아 갖가지 신병기가 기획중이며 me262대량생산공장이 지하에 존재하고 매주 기차5대분의 추가 훈련병이 도착하고 30만명의 정예 친위대가 지키는 묵시록적인 요새였다. 뭐 내부적으로 이게 말이나 되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연합군은 베어볼프에 대해 꽤 심각하게 생각했고 바바리아 지방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을 베를린 이상으로 두는것에 대해 고려했다는 주장도 있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51496083d.jpg" width="400" height="33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51496083d.jpg');" /></div><br>&lt;연합군정보국 머리속의 알프스요새 이미지는 이런게 아니었을까?&gt;<br><br>그러나 연합군이 베어볼프의 실체를 알게 되는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br><br>1945년 4월, 한 독일군 장성이 엘베강을 넘어와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쿠르트 디트마르 중장이었는데, 당시 그는 연합군에게 포로가 되기 싫어 자살했다는 루머가 떠돌던 인물이었다. <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6e3cd98b.jpg" width="500" height="341.02564102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6e3cd98b.jpg');" /></div>&lt;연합군에게 항복하는 쿠르트 디트미르 중장&gt;<br><br>연합군은 가장최근에 확보한 이 고위급 포로에게 알프스요새의 실체를 물었다.<br>그러자 쿠르트 디트마르장군은 한참을 웃은뒤 말했다.<br><br>"그걸 믿었어요? 그건 단지 전설인 뿐입니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73912553.jpg" width="480" height="36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73912553.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7478401a.gif" width="162" height="19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7478401a.gif');" /></div><br>연합군 정보부의 가장 큰 고민거리중 하나가 고위급포로의 웃음거리가 된것이다. 이로서 연합군은 가장 두려운 나치의 비밀병기에 대한 우려는 씻어낼수 있었는데... 남은 문제는 알프스요새는 아니더라도 실제 베어볼프의 전투력이었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97b0ddfc.jpg" width="324" height="21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97b0ddfc.jpg');" /></div><br>6인 1조로 구성되어 전장에 투입된 베어볼프들의 전투력은 극과 극이었다. 매복과 저격으로 연합군의 진격을 몇시간이고 묶어둘수있는 조도 있었지만, 사격몇번으로 전의를 상실하는 경우도 있었다.<br><br>산전수전 다 겪은 SS 베테랑들과 나이 어린 소년소녀들이 같이 배치되다보니 생긴 결과였는데, 공황상태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보기에 따라선 '위험한 장난'수준의 작전도 전개되었다.<br><br>죽은 독일군수통에 독을 넣은 술을 넣는다든가, 미군이 사용할 석탄에 폭발물이 섞인 석탄을 집어넣는다는가 하는 방식이었다.<br><br>이런 소규모그룹외에도 대규모그룹을 구성, 연합군을 공격하려던 시도도 있었다. 프란츠 오펜호프박사암살과 이어 4월1일 첫방송을 시작한 베어볼프라디오로&nbsp;고무된&nbsp;하라코프 공방전 참전자인 만스펠트중령은 유겐트단원들과 군병원에 있던 무장친위대원들과 루프트바페 소년단 그리고 나폴라의 학생등. 긁어모을수있는 모든 병력을 긁어모아 600명의 하르츠 전투그룹을 구성. 미군과의 전투에 나섰다.<br><br>그러나 20여일동안 7차례의 전투를 치룬 결과, 하르츠 전투그룹은 600명에서 50명으로 줄어들었다. 패하고 굶주린 이들은 최후에 미군 보급물자를 습격을 시도했지만 미군의 공습에 겁이 질린 나머지 흩어지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br><br>이들 그룹의 마지막 생존자인 두소년은 미군에 대한 정탐활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한명인 16세, 나머지 한명은 17세인 소년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6월 5일이다.<br><br>나치스는 소년, 소녀들을 전장들을 내몰았고, 연합군은 이들에게 자비롭지 못했다. 연합군은 게릴라공격을 당할때마다 철저하게 보복했다. 포로들을 굶주리고 마을을 불태우거나 심한 경우 인질로 잡아놨던 포로를 죽였다. 그리고 포로가 된 베어볼프는 여지없이 죽였다. 베어볼프들이 대부분 군복이 아닌 연합군복이나 민간인옷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소련군이건 미군이건 마찬가지였다.<br><br>1945년 5월, 전쟁은 끝났고, 늑대들이 그토록 숭배하던 총통도 그들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렇다고 베어볼프의 활동이 중단되진 않았다. 어떤 면에선 오히려 촉진되었다.<br><br>함부르크 북쪽에서는 무장친위대와 베어볼프들이 연합해 영국군 11기갑사단 2개대대와의 전투를 계속했다. 되니츠는 이들이 교전중단명령을 거부하자 팔슈름 야거 8사단을 파견해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결국 영국군과 팔슈름야거에 대항한 베어볼프와 ss의 교전은 하루동안 지속되었고, 교전이 끝난뒤, 팔슈름 야거들이 ss들이 있던 곳에서 본것은 이리저리 널려있는 시체들이었다. 일부는 자살한 흔적이 역력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8352e8d3.jpg" width="500" height="666.66666666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8352e8d3.jpg');" /></div>&lt;1945년 5월 미군과 함께 있는 팔슈름 야거&gt;<br><br>"도대체 총통은 이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거지?"<br><br>비슷한 상황은 베를린 근교의 베어볼프캠프에서도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베어볼프 생존자들이 벙커에 남아 소련군에게 저항했던 것인데, 소련군은 이 한줌도 안되는 적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대신 베를린시민들에게 베어볼프 캠프까지 길을 터주었다.<br>베를린시민들은 벙커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고, 그게 원래는 누구에게 가야할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베를린 시민들은 소련군의 방조속에 벙커로 쏟아져 들어갔고 그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했던 식량들을 되찾아왔다.<br><br>나치스의 망령, 베어볼프는 1947년까지 남아 독일을 떠돌았다. 1945년 6월 5일 그들이 브레멘의 경찰서에서 자행한 폭탄테러로 44명의 미군과 독일경관들이 사망했으며 그들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테러가 연이어 발생했다. 연합군은 이런 사건보도를 엄격히 통제했는데 오히려 베어볼프들을 고무시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br><br>이후 베어볼프들은 사실상 무법자 집단화된후 소멸되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네오나치단체들은 스스로 베어볼프란 이름의 계승자를 자처하고 있다.-덤으로 게임, 애니, 영화등에서 마르지 않는 소재를 제공해주고 있다.<br>뭐 대충 요런것들 말이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9e8cb090.jpg" width="500" height="212.22410865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9e8cb090.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9f537ebf.jpg" width="500" height="356.125356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9f537ebf.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9fd61c25.jpg" width="500" height="35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8/70/e0019270_48a979fd61c25.jpg');" /></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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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side of history</category>
		<pubDate>Mon, 18 Aug 2008 13:33:39 GMT</pubDate>
		<dc:creator>Cicero</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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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레오폴드와 빌헬미나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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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1940년 4월, 전쟁이 스칸디나비아반도국가를 휩쓸고 지나간지 딱 한 달이 지난 5월 10일, 이번에는 벨기에가 독일의 침공을 받았다. 오랜세월동안 독일과 프랑스의 틈바구니에 끼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베네룩스국가들이 또다시 전쟁에 휩쌓이게 되었다.<br>&nbsp;<br>벨기에로서는 이것이 20세기들어서 두번째로 맞이하는 독일의 침공이었다. 지난 1차대전의 악몽같은 기억은 종전이후에도 벨기에인들에게 독일의 팽창을 경계하게 만들었고,&nbsp;덕분에 나치스의 집권과 팽창야욕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던 30년대에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굳건한 방어선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독일의 침공이 시작되었을때, 레오폴드와 그의 정부는 이 방어라인에 기대 저항하다가 연합군의 지원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벨기에같은 소국이 계획할수있는 최선의 방어계획이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0fcf972a53.jpg" width="408" height="59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0fcf972a53.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lt;레오폴드3세와 그의 첫 아내 아스트리드&gt;</div><br>벨기에군은 침략자들에 맞써 분전했고 침공후 3주동안 저항을 계속했다.그러나 독일은 이미 프랑스국토로 침공해 들어가고 있었고, 영국대륙원정군은 덩케르크로 쫒겨가고 있었다. 벨기에군은 분명 열심히 싸웠지만 그것이 결코 벨기에의 운명을 구하진 못했다. 결국 5월 28일, 레오폴드는 독일에게 항복을 선언했고, 독일군이 브뤼셀이 진주하는 그순간에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br><br>"배신자! 그가 벨기에를 독일에 팔아넘겼다!"<br><br>레오폴드의 항복은 이미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중인 벨기에 정부와 다른 연합국들에게 명백한 배신으로 비춰졌다.그들은 레오폴드를 맹렬히 비난했다. '벨기에 정부가 망명할때, 함께 떠나지 않고 항복한후 독일군의 도착까지 기다렸다.' 보기에 따라선 충분히 배신으로 비춰질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난 전쟁에서 독일에 저항해 끝까지 항전했던 그의 아버지 알버트1세의 그림자는 레오폴드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br><br>아마 독일도 레오폴드의 행동이 연합국에 대한 배신이자, 자신들에 대한 협조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독일은 레오폴드에게 자신들이 새로 구성할 벨기에 괴뢰정부의 수반이 되어주길 요청했다. 레오폴드는 독일의 요청을 거부했다. 벨기에 국왕으로서 '자신은 국민들을 살리기위해 항복한것이고 남아서 국민들을 살피기위해 남은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어디까지나 본인의 주장이다. <br><br>독일은 레오폴드의 꽤씸한 태도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br><br>"그놈 어디 적당한데다 가둬버려!"<br><br>레오폴드는 브뤼셀에 잇는 왕궁에 연금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연금생활이 레오폴드를 위축시키거나 불편하게 만들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1941년 9월 11일, 그는 오랫동안 내연 관계에 있던 릴리안 바엘과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뒤-혼인신고만했다.-&nbsp;한달이 지난 12월 6일 결혼식을 가짐으로서 대외적으로 공표했다. 벨기에 국민들은국왕의 돌출행동에 적잖은 충격을 입었다. <br><br>지금 나라가 점령되 있는 판국에 결혼이라니?&nbsp;국왕이 맨정신인건가? 게다가 법적인 혼인 이후에 한달이 지나고서야 결혼식을 올리다니 뭔가 캥기는게 있는거 아닌가? 아무리 전처인 아스트리드가 사망한지 7년이나 지났다지만 이건아니지 않은가?<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0fe68cc411.jpg" width="435" height="6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0fe68cc411.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lt;레오폴드의 두번째 아내. 릴리안 바엘. 레오폴드가 연금된 기간에 결혼했다&gt;</div><br>벨기에 국민들은 국왕의 돌출행동에 불만을 표했고, 마헬렌의 주교는<br>&nbsp;<br>"레오폴드와 릴리안사이에 태아난 아이는 왕위계승권이 없다!"<br><br>라고 선언해버렸다. 그의 두번째 결혼은 이렇게 촉북받지 못한 결혼이었다.<br><br>레오폴드는 독일의 점령기간동안 결혼문제를 제외하고는 나름 별 문제없이 보냈다. 뭐 옆나라의 빌헬미나와 하콘 7세처럼 망명가서 저항한것도 아니고, 크리스티안10세처럼 은근히 독일 속을 긁어대지도 않았으며 루마니아의 미하일처럼 연합군으로 갈아타지도 않았으며 비밀리에 레지스탕스조직과 연계하지도 않았다. 뭐 솔직히 조용히 지낸거라기보단 연금이라는 조용히 지낼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br><br>그러나 1944년 이후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계정세가 그를 가만히 냅두지 않았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붉은 군대가 거칠것 없이 서진해오자, 히믈러는 친위대 병력을 동원해 레오폴드와 그 가족을 독일 영내로 이송했다. 레오폴드와 그 가족은 힐슈타인에 머물다가 다시 오스트리아 스트로뵐로 이송된 후 그곳에서&nbsp;종전을 맞이했다.<br><br>이제 레오폴드는 벨기에국민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고국으로 돌아가는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레오폴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의 반역혐의와 그에 따른 벨기에 정부의 입국거부였다. 벨기에정부와 연합국들은 1940년 5월, 레오폴드의 항복에 대한 악감정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혹자는 벨기에가 항복함으로서 덩케르크의 연합군이 고립되었기 때문에 레오폴드가 그 모든 책임을 저야한다고 주장했다.&nbsp;게다가&nbsp;레오폴드는 1944년 어떤 경우를 상정해 정치적 유언장을 남겼는데 그것은 "연합군이 벨기에를 점령하게됬을때&nbsp;내가 없을 경우"였다.&nbsp;벨기에정부는 유언장이 공개됬을때 가져올&nbsp;사회혼란때문에 공개하진 않았지만 레오폴드가 해방이 아닌 점령이란 단어를 사용한것에 대해 매우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nbsp;&nbsp;레오폴드가 독일로 이송되고 이어서&nbsp;귀국이 거부되면서 빈 왕좌는 1944년부터 그의 동생인 찰스왕자가 섭정을 맡았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0fded81652.jpg" width="143" height="24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0fded81652.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lt;레오폴드3세의 동생으로 섭정을 맡았던 찰스왕자&gt;</div><br>1946년, 결국 오랜 논쟁끝에 레오폴드의 반역혐의는 무죄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그의 무죄와는 별도로 벨기에 정부는 그의 귀국허가를 미뤘고 1950년 국민투표의 결과 벨기에 국민의 57%가 레오폴드귀국에 찬성함으로서 레오폴드는 6년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귀국할수있었다. 이후 레오폴드는 그동안 정부와의 마찰때문인지 혹은 정치적 환멸때문인지 1951년 7월 16일, 그의 아들 보두앵에게 양위하고 물러난뒤 1983년 사망했다.<br><div style="TEXT-ALIGN: cente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0fe90b4233.jpg" width="185" height="25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0fe90b4233.jpg');" /></div>&lt;레오폴드3세의 아들 보두앵1세&gt;</div><br>그는&nbsp;어쩌면 1940년,정부를 따라 망명하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는지도 모른다. 뭐,그러고보니 야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가 피난하지 않은 이유를 릴리안 바엘과의 관계때문이었다고도 주장하기도 하던데...글쎄?...<br><br>벨기에가 침공당했던 1940년 5월 10일, 이웃나라인 네덜란드 역시 독일군의 침공을 받아 불과 7일만에 독일군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벨기에가 3주간 버틴거에 비교하면 점 어처구니 없이 무너진 샘인데... 사실 1차대전 종전 이후의 분위기상,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해 특별히 위협을 느낄 이유는 많지 않았다. <br><br>네덜란드는 벨기에와 달리 지난 전쟁때 독일의 침공을 받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때는 네덜란드는 독일의 우호적인 중립국이었다. 1차대전 발발 전까지만 해도 빌헬미나는 독일의 팽창야욕을 경계했지만 정작 전쟁이 벌어지자 네덜란드를 압박한건 영국이었다.&nbsp; 영국은 독일을 굶겨 죽이기위해 유럽의 항구들을 봉쇄했고, 그중에는 독일이 적잖은 투자를 했던 네덜란드의 항구들도 포함됬다. 결국 네덜란드는 먹고살기위해 독일과 교역했고 독일군 보급물자에서 네덜란드제품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0ff25887e1.jpg" width="493" height="61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0ff25887e1.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lt;빌헬름2세가 퇴위한뒤 망명한 곳도 네덜란드였다.&gt;</div><br>네덜란드와 독일이 이런 관계였다보니, 1940년 독일의 침공은 그들에게는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7일만에 점령당한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br><br>네덜란드의 국왕이었던 빌헬미나 여왕은 5월 10일, 침공이 시작된지 3일후, 영국군순양함을 타고 런던으로 도망쳤다.(하지만 도망치고나서 보니 도망친 모양새가 영 안좋았던지)&nbsp;런던으로 망명한 빌헬미나는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가 항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전 벨기에국왕 알버트1세처럼 조국으로 돌아가 남은 병력을 규합해 독일과 항전을 계속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영국은 빌헬미나의 의사를 받아들여 순양함 헤이그에 그녀를 태워 네덜란드해안에 접근했지만... 헤이그의 함장은 루프트바페의 거센공격으로 인해 상륙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br><br>"짐은 곧 돌아올것이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101e39f563.jpg" width="352" height="44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101e39f563.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lt;네덜란드의 빌헬미나여왕 &gt;<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0.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102aa6f681.jpg" width="500" height="28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0.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102aa6f681.jpg');" /></div>&lt;구글에서 Wilhelmina라고 치자 제일 먼저 눈에 띄던 이미지... &gt;<br></div>결국 빌헬미나의 상륙계획은 좌절되었고 그녀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다.-혹자는 이게 독일군의 저항이 거세서 그랬다기보단 이미 네덜란드를 구하는것은 불가능해보였기때문에 나온 판단이라고도 주장한다. 1940년 5월 15일, 네덜란드에서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네덜란드군이 항복하자, 빌헬미나와 네덜란드 각료들은&nbsp;망명정부를 구성했다.<br><br>하지만 망명정부와 빌헬미나간의 사이는 그리 좋진 못했다. 연합군의 승리에 대해 회의적인 망명정부의 수상인 드리크 장 드 기르가 나치스독일과의 평화협상을 맺고자 하는데 반해 빌헬미나는 이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br><br>"연합군은 승리하지 못한다."<br><br>"침략자들과 협상은 없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11.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102526cd22.jpg" width="180" height="26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11.egloos.com/pds/200808/12/70/e0019270_48a102526cd22.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lt;나치와의 평화협상을 주장했던 디르크 장 드 기르&gt;</div><br>두사람 모두 양보할 생각이 없었고, 망명정부내에서 기르와 빌헬미나간의 대립은 격해졌다.빌헬미나는 기르의 협상론에 반대하는 법무부장관 피터 게르반디와 연대해 그에게 힘을 실어주어 기르를 굴복시켰다. 기르는 사임했고 피터가 새로운 수상에 임명되었다. <br>빌헬미나는 대 네덜란드프로파간다방송인 오렌지라디오를 통해 국민들에게 지속적인 저항의 메세지를 보냈다. 그녀는 히틀러의 '인류의 적'으로 칭하며 그에 대항한 지속적인 저항을 촉구했다. 나치스에게 점령한 유럽국가의 왕들이 대부분 그렇듯히 그녀는 네덜란드국민들에게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br><br>독일의 점령기간동안 어느 시골마을은 그녀의 생일날 교회에서 네덜란드국가를 부르며 그녀의 생일을 축하했다. 독일 점령당국은 그 마을 6만길더의 벌금을 때렸다.<br><br>다른 연합국정부들도 그녀의 이런 행동을 극찬했다. 영국정부는 그에게 가터기사단의 작위를 주었고, 윈스턴 처칠은 그녀를 평하면서 "망명정부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핑했다. <br><br>1945년, 네덜란드가 연합군의 진격으로 조금씩이나마 해방되기 시작하자, 그녀는 즉시 고국을 찾았다. 그는 3월 중순, 연합군이 해방시킨 그녀의 조국을 돌며 국민들을 찾았다. 국민들은 돌아온 국왕에게 열렬한 환영을 보냈다. 종전 이후, 그녀는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헤이그에 있는 저택에 머물면서 계속 국민들을 위문했다. 그녀는 때론 자전거를 탄 소박한 모습으로 국민들을 찾아가기도 했다.-그녀는 전쟁중 캐나다에서 머무는 동안에도 스스로 쇼핑하고 횡단보도에서 손들고 건너는 모습등으로 서민적 이미지를 풍겼다.<br><br>그러나 종전후,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에서 격해진 민족해방운동으로 인해 네덜란드의 식민지수입이 감소하자, 정치인들과 관료들, 경제인들은 빌헬미나를 비난했다. 결국 1948년, 그녀는 그의 딸에게 양위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비록 네덜란드고위층에게 비난받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서민층에게는 인기인이었다. 퇴위후 그녀가 네덜란드를 여행할때마다 그녀주변엔 언제나 인파가 가득했다.<br><br>빌헬미나는 1962년 11월 28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br><br>-----<br><br>덤, 매번 느끼지만 이글루테마에 '역사'카테고리가 생겼으면 좋겠다. 매번 어정쩡하게 세게 카테고리에 보내는것도 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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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3 Aug 2008 11:23:22 GMT</pubDate>
		<dc:creator>Cicero</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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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스칸디나비아의 형제 국왕들. 크리스티안10세와 하콘7세.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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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1905년, 노르웨이가 스웨덴에서 분리되자 당시 덴마크국왕 프레데릭8세의&nbsp;차남인 칼왕자는 하콘7세로 노르웨이국왕의 자리에 올랐다.그로부터 7년후인 1912년, 하콘7세의 형인 크리스티안왕자가&nbsp;크리스티안10세로 덴마크의 왕위를 계승해, 형제가 두국가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3a68e2b5.jpg" width="180" height="28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3a68e2b5.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3eda240b.jpg" width="329" height="42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3eda240b.jp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lt;上-노르웨이 국왕 하콘7세, 下-그의 형이자 덴마크국왕인 크리스티안10세&gt;</div><p><br><br>이후 덴마크와 노르웨이는&nbsp;프레데릭8세의 두아들의 통치를 받으며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비교적&nbsp;안정된 시기를 보냈다. 두국가 모두 1차대전 기간동안 중립을 유지했으며, 중립의 위치를 살린 교역덕분에 꽤짭짤한 수익을 얻었다.&nbsp;또한&nbsp;"공산주의자"&nbsp;하콘7세의 정치성향덕에 노르웨이는 오늘날과 같은 복지체계를 차근차근쌓아갔으며, 덴마크는 1차대전에서 패한 독일을 압박해 1864년에 프로이센에게&nbsp;빼앗겼던 슐레스비히의 북부를 주민투표를 통해 돌려받았다.&nbsp;-덴마크는 슐레스비히의 북부와 중부를 주민투표를 통해 어느국가로 귀속될지 정하고자 했는데, 북부는&nbsp;덴마크에 귀속된 반면, 중부는 독일에 남았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36780281.png" width="200" height="24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36780281.pn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lt;붉은 색이 북부 슐레스비히, 현재는 남 유틀란트로 불린다.&gt;</div><p><br><br>&nbsp;그러나 이 스칸디나비아반도국가들의 안정된 시기는 그리 오랫동안 지속될수 없었다. 940년, 4월 9일 새벽, 독일군이 노르웨이의 오스카보르그요새를 공격하면서 노르웨이는&nbsp;전쟁에 휘말리고 말았고, 곧이어 덴마크도 같은 운명이 되고 말았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4472ca19.jpg" width="500" height="332.44680851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4472ca19.jp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lt;오스카보르그요새의 해안포&gt;<br></div><p><br>개전과 동시에 노르웨이를 굴복시킬수있다고 믿었던 독일은 침공군함대에 상륙군은 물론이고 이후 제반 통치를 위한 게슈타포와 기타공무원까지 동반해 침공해왔다. 그러나 오스카보르그의 해안포는 이런 독일의 오만을 비웃기라도 하듯, 포켓함 루트조브와 중순양함 블뤼허를 침몰시켜 버렸고, 독일의 침공계획은 자연스럽게 지연될수밖에 없었다. <br><br>다음날인 4월 10일, 독일의 외교사절 쿠르트 브루어가&nbsp;하콘7세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쿠르트는 하콘7세에게&nbsp;형인 크리스티안10세처럼 즉각 항복할것과 노르웨이 나치스의 지도자인 비드쿤 크비슬링을 수상으로 임명할것을 요구하면서<br><br>" 만약 요구를 거부하시면 가혹한 결과가 따를지 모릅니다."<br><br>라는 충고-말이좋아 충고지, 협박.-도 잊지 않았다. 하콘7세는 자신의 권한이 아니니 의회에 통보하도록하겠다고 답했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4722c554.jpg" width="463" height="40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4722c554.jp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lt;반역자의 대명사가 된&nbsp;크비슬링&gt;</div><p><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839821afb.jpg" width="500" height="359.84095427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839821afb.jpg');" /></div><em></p><div style="TEXT-ALIGN: center"><em>크비슬링:총통각하, 제가 크비슬링입니다.<br>히틀러:그럼 이름은 뭔가?<br></em></div><p></em><br><br>쿠르트와의 면담 후, 하콘7세는 의회를 찾아가 독일의 항복 요구를 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br><br>"...이러한 재앙을 불러온데 대한 책임은 짐이 무덤까지 지고갈것이다. 이제 정부가 결정할 일만 남았고 짐의 입장은 명확하다. 짐의 입장에선 독일요구를 도저히 받아들일수없다. 그러한 행동은 짐이 35년전 노르웨이의 국왕이 되면서부터 지켜왔던 모든 가치관에 대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또한 크비슬링을 수상에 임명하지 않을것이다. 그것은 정부도, 국민도 원치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br><br><br>좋게말하면 입헌주의에 입각한 행동이고, 나쁘게 말하면 책임회피였다. <br>결국 의회는 독일의 최후통첩을 거부했다.노르웨이는 항전의지가 남아있는 최후의 순간까지 독일의 침공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스칸디나비아반도소국의 저항의지는 독일을 분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4월 11일, 루프트바페는 전화를 피해 노르웨이 의회가 와있던 뉘베르그순을 폭격했다. 독일군의 공격이 임박해오자, 하콘7세와 노르웨이정부는 다시 눈 덮힌 숲길을 지나 노르웨이 북서쪽 해안의 몰데로 피난한뒤, 다시 영국 순양한 글래스고우를 타고 트롬쇠에 도착한 5월 1일, 숲속오두막집에서 망명정부를 꾸렸다. 그의 경호병력이라고는 고작 근처 마을에서 왕을 위해 찾아온 사냥꾼들뿐이었다. <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4dcc78d6.png" width="500" height="394.59459459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4dcc78d6.png');" /></div><br>트롬쇠에서의 하콘7세의 생활은 별로 길지는 못했다.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승리에 이어서 독일은 프랑스마저 패배시켰기 대문에 트롬쇠는 더이상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다. 영국은 순양함1척과 구축함두척을 동원해 차디찬북해를 시속32노트로 달려 하콘7세와 그 일행을 실어날랐다. 런던에 도착한 하콘7세는 그곳에서 망명정부를 꾸려 독일에 대한 항전의지를 표명했다.<br><br>이런 하콘7세의 행동은 노르웨이인들의 점령군에 대한 저항을 고무시켜주었고, 하콘7세는 노르웨이 저항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많은 노르웨이인들이 그들의 저항의지의 상징으로 자신들이 세길수있는 모든것에 하콘7세의 이니셜인 H7을 세기고 다녔다.<br><br>물론 독일이 이걸 이쁘게 봐줄 일은 결코 없었고 하콘7세의 정치적상징성을 깍아내리기 위해, 독일의 노르웨이총독인 요세프 테르보펜은 6월27일을 괴뢰정부의 외회대표에게 하콘7세의 퇴위를 요구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매우 당연하게도 하콘7세는 이러한 요구를 깔끔히 거절했다. 요세프는 하콘7세의 이러한 행동에 분노했고 급기야는 노르웨이의 괴뢰정부를 움직여 그를 퇴위시키고는 급기야 왕실의 모든 권리를 정지시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물론 이런 조치는 하콘7세에 대한 지지를 더욱 강화시켜줬을뿐이었다. <br><br>결국 전쟁이 끝난 1945년 6월 7일, 하콘7세는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돌아왔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550eb1f1.jpg" width="350" height="23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550eb1f1.jp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lt;노르웨이로 돌아오는 하콘7세와 가족들&gt;</div><p><br><br>하콘7세가 독일에게 항복보다는 저항을 택했다면 그의 형 크리스티안10세는 독일에게 넙죽항복하는쪽을 택했다. 그것도 그의 동생을 설득하려는 독일측에게 훌륭한 예시가 되도록, 침공당일인 4월 9일에 말이다. 그의 동생과 대비되는 행동이었는데, 그렇다고해서&nbsp;크리스티안10세가 친독적인 성향이었던 인물은 아니었다.<br>&nbsp;<br>그는 앞서 소개했듯히 독일로부터 슐레스비히를 받아냈으며, 더 나아가 플렌스부르크마저 독일로부터 빼앗아오려다, 의회의 격심한 반발로 좌절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언제나 힘있는 독일을 두려워했고 어떻게든 약화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고 결국 독일이 강국이 되어 나타났을때, 그에겐 항복이 그의 국민들을 보호하기위한 최선의 수단이었다.<br><br>크리스티안10세는 독일에게 항복했지만 덴마크국민들은 그렇다고 그를 굴욕과 패배의 상징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덴마크인들은 그에게 꾸준한 충성과 존경을 보냈고, 그는 그에 화답하듯 경호원도 없이 매일 말을타고 시내로 나가 국민들을 만났다.<br><br><br><em>어떤 독일군 병사가 덴마크 소년에게 물었다.<br><br>"너희 왕은 경호도 없이 돌아다니는구나."<br><br>그러자 소년이 답했다.<br><br>"모든 덴마크인들이 그분의 경호원인걸요."</em><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57e5a9f1.jpg" width="306" height="45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57e5a9f1.jpg');" /></div><br>그는 그의 동생만큼 적극적으로 저항하진 않았지만 조용히 독일점령에 저항했다. 유대인문제에 있어서도 덴마크정부는 경제적지원을 미끼로 덴마크내 유대인들을 지켜냈고, 1943년 독일이 덴마크내의 유대인에 대한 '해결'에 나서려 하자, 덴마크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과 사회,종교단체들이 7000명에 이르는 덴마크유대인들의 탈출을 도왔다.<br><br>1942년 5월에는 히틀러가 크리스티안10세의 생일을 맞아 장문의 축사를 보냈다. 크리스티안10세는 이장문의 축전에 "매우 감사, 크리스티안10세"로 대답했다. 70넘은 노친네의 노망일수도 있고, 은유적인 저항의지일수도 있지만 어쨋든 이 단문의 답신은 히틀러를 화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래봤자 이게 덴마크에 대한 '어떤'행동을 하기엔 구실이 못 되지만...<br><br>덴마크국민들은 이런 자신들의 저항의지의 상징으로 떠 받들었고, 노르웨이인들이 그랬던것처럼, 그들도 왕의 이니셜이 세겨진 핀을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했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59cb8fdf.jpg" width="500" height="318.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8/08/70/e0019270_489b359cb8fdf.jpg');" /></div><br>결국 프레데릭8세의 두 아들은 선택은 달랐지만&nbsp;암담했던 독일의 점령기간동안 둘다 국민들의 저항의지를 고취시키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독일의 침공을 받았던 다른 나라의 국왕들도 대부분 이들과 같은 선택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가 항상 이들과 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벨기에의 레오폴드와 네덜란드의 빌헬미나는 다스리는 국가가 인접해있다는 점과 한명은 항복을, 한명은 저항을 택했다는점에서 스칸디나비아의 형제들과 비슷했다.-물론 나머지부분에선 상당한 차이를 보이지만-그러나 두 국왕의 선택의 결과는 형제들의 그것과는 틀렸다.</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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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side of history</category>
		<pubDate>Thu, 07 Aug 2008 23:28:25 GMT</pubDate>
		<dc:creator>Cicero</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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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어떤 국방부의 금서 목록, 어떤 국방일보의 추천도서.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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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옙~. 시간을 (거꾸로)달리는 국방부가 멋지게 한건하셨다.<br><br><a title="" href="http://phdzz.egloos.com/1912355">[당 정치위원회의 성명서] 국방부의 분서갱유...또냐???</a><br><a href="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01&amp;newsid=20080731100105713&amp;cp=hani"><br></a><a href="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01&amp;newsid=20080731100105713&amp;cp=hani"><span style="COLOR: #95ba2e">[한겨레] 군, 대학교재·베스트셀러도 “불온서적”- 국방장관 지시따라 책23권 차단·수거명령 </span><br></a><a href="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01&amp;newsid=20080731100105713&amp;cp=hani"><br></a><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4e9792964.jpg" width="290" height="44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4e9792964.jpg');" /></div><br><br><br><br>아마 이명박정부수준 맞추느라고 불온서적 정리해서 금서목록을 만드셨는데...이건 참 수준이 개그다. &lt;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gt;가 반자본주의가 아닌 북한찬양 카테고리에 들어갔는지는 의문이지만...<br><br>반정부,반미 카테고리에 &lt;나쁜 사마리아인&gt;?<br>이양반들 책은 제대로 읽어보고 목록 정한건가? 읽어보신분들은 알겠지만 나쁜 사마리아인은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에 관한 책이다.-대부분 국가들이 자유무역보다 보호무역을 자주하며, 선진국들이 보호무역으로 이윤을 얻은뒤, 후진국가들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하는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주요내용이다..참고로 2007년조선일보가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던 책이다. 근데 그게 반정부, 반미로 구분되나?&nbsp; 누가 켐브리지대학 경제학교수책이 금서목록에 들어가야하는 이유좀 명쾌하게 설명해주라!<br>아항~ 한미FTA에 대한 반대가 곧 반미, 반정부라는 얘기 같으신데...<br><br><br><br><br><br><br>그럼 이책들은?<br><br><br><br><br><img class="image_left"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0408f4f5.jpg" width="150" height="21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0408f4f5.jpg');" align="left"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04d9c3ec.jpg" width="148" height="21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04d9c3ec.jpg');" /></div><br>한미FTA반대의 선봉으로 뛰는 우리 이해영교수님이 저자거나 공동저작인 책들이다. 솔직히 한미FTA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이란면에서보면 더하면 더했지 덜한책들이 아닌데 용케 금서목록을 피해갔다. 일관성이 없는건지 아니면 알바들 끌어다 쓴건지...<br><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9edcd8b6.jpg" width="150" height="14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9edcd8b6.jpg');" /></div><br>말이 나와서 하는거지만 군의 검열체계라는거, 시대를 역행하는건 둘째치고 기준도 엉망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필자는 군시절 부대에서 도서관 관리병으로 일했었다. 당시 교보문고와 문광부에서 기증한 책들중에는 이런것들이 있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4753c0a7.jpg" width="150" height="21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4753c0a7.jpg');" /></div>말그대로 북한 현대사. 북한에 대한거면 뭐든지 알레르기 일으키는 국방부가 용케도 받았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4a839eb3.jpg" width="150" height="21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4a839eb3.jpg');" /></div>제목부터 포스가 느껴지는 '한국인 탈레반'. 파키스탄주재무관이던 예비역장교분이 자신의 아프가니스탄방문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탈레반 입장에서 미국 조낸 까는 내용이 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54243d35.jpg" width="150" height="21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54243d35.jpg');" /></div>&nbsp;노동자들의 잡지, 노동자의 힘을 출판하는 잡지 메이데이에서 출판한 책.이 이상 코멘트가 필요한가?<br><br>이외에도 몇권 더있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넘어가도록하자.<br>뭐 이걸보면 이런 말도 나올수 있을꺼다. '고작 단위부대차원이니 그럴수도 있는거 아냐?'라고 말이다.<br>그래? 그럼 이쪽을 보시길.<br><br>국방일보의 '어떤' 추천도서리뷰다.<br><br><a href="http://kookbang.dema.mil.kr/kdd/HearTypeView.jsp?writeDate=20070126&amp;writeDateChk=20070126&amp;menuCd=3004&amp;menuSeq=9&amp;kindSeq=3&amp;menuCnt=30914">http://kookbang.dema.mil.kr/kdd/HearTypeView.jsp?writeDate=20070126&amp;writeDateChk=20070126&amp;menuCd=3004&amp;menuSeq=9&amp;kindSeq=3&amp;menuCnt=30914<br></a><br>기사보기귀찮으신분은 이쪽 책표지를 봐주시길.<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701c85e1.jpg" width="175" height="25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701c85e1.jpg');" /></div>제목과 표지부터 노골적으로 석유를 위한 전쟁(이라크전쟁)을 비난하고 있는 책. '석유, 욕망의 샘'이다. 이라크해방을 위해 미국과 함께 이라크에 파병한 국가의 국방부 공식신문에 이런 책이 추천도서로 올랐던 것이다.<br><br><br><br><br>이쯤&nbsp;보면 이인간들... 일관성이라곤 전혀 없다. 그냥되는데로 아무거나 잡아서 금서목록 만드는거다.대체 이들의 정체는 뭐지?<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92a24eca.jpg" width="265" height="2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92a24eca.jpg');" /></div><br><br><br>기왕 이렇게 된 김에 국방부금서목록에 올릴만한 책을 한권 추천해 드려야겠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81f8dfb7.jpg" width="120" height="17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31/70/e0019270_4891581f8dfb7.jpg');" /></div>Z.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 미국이 유라시아를 하나의 체스판으로 보고 타국들을 어떻게 체스말처럼 움직여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 해야하는지를 제시한 책이다.<br>읽고나면 미국이 벌이고 있는 거대한 체스게임의 일개말로 전락한 느낌이 들어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미국이 혐오스러워진다.-아 물론 개인적인 경험상. 이만큼 위험한 반미서적이 있나? 국방부는 금서목록에 '필히'추가해 주길. 대한민국장병들이 미국의 일개 장기말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안되잖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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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정치</category>
		<pubDate>Thu, 31 Jul 2008 06:23:23 GMT</pubDate>
		<dc:creator>Cicero</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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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중국의 이탈리아군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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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br>BGM은 이탈리아어버전의 판저 리드<br><br><br><embed style="LEFT: 5px; WIDTH: 300px; TOP: 69px; HEIGHT: 45px"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31/70/Sui_monti_sui_mar.mp3" width="300" height="45" type="audio/mpeg"><br>---------------<br>19세기말엽부터 20세기 초, 이미 막장으로 치달은지 오래인 중국의 마지막왕조인 청조가 임종전의 가뿐숨을 몰아쉬던 때의 일이다. 당시 중국은 반식민지화된 상태였고 핵심적인 이권들은 모두 서양열강들에게 빼앗기고, 열강들의 지원을 입은 기독교선교가 조차지를 중심으로 보수적인 중국인들의 반감을 사며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반감은 둑일의 조차지인 산둥반도에서 눈에 띌정도로 심했는데, 이곳의 교회는 독일의 지원으로 하나의 권력기관화되어버렸다. <br><br>"산둥에서 문제가 생기면 관청보단 교회에 가서 얘기하라."<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8a05ac3e.jpg" width="434" height="39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8a05ac3e.jpg');" /></div><br>결국 이런 상황으로 인해 이지역의 반기독교감정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이지역에서 최초의 의화단봉기가 일어나게되고 봉기는 곧 북경등, 중국의 주요도시로까지 번져나간다. 봉기의 세력과 영향력은 점점 증대되어가는것을 본, 서태후를 비롯한 청조의 지도부는 의화단을 후원할것을 명하지만, 열강의 힘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결정이었다.<br><br>서구의 제국주의국가들은 의화단봉기의 진압을 위해 독일을 중심으로 연합군을 편성해 원정에 나섰다. 잘무장되고 훈련된 열강의 군대앞에 의화단은 허무하게 무너질수밖에 없었다. 청조도 뭔가 잘못되간다는 걸 알고, 도리여 희화단진압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의화단은 무너졌고, 청조는 또다시 열강에게 '배상'해야했다.<br><br>열강은 9억8천만냥이라는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수많은 조차지를 얻어냈다. 불과 몇명의 공사관원과 사업자들을 지키기위해 2만명의 병력을 파견했던 이탈리아도 텐진과 상하이, 베이징에 조차지로 얻었는데,&nbsp;이곳들이 이탈리아의 최초이자 유일한 아시아식민지였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8c36867c.jpg" width="284" height="20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8c36867c.jpg');" /></div> <div style="TEXT-ALIGN: center">&lt;텐진의 이탈리아군과 외교관들&gt;</div><br>이탈리아의 유일한 아시아식민지라고는 하지만 이탈리아는 적어도 1차세계대전때까지는 이 식민지를 지키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것 같진 않다. 1915년 당시 이곳을 방어하는 병력은 200명의 베르사리엘리와 50명의 중국인병력, 그리고 좀 특이한 경력의 1개대대(이탈리아와 오-헝제국전선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러시아에게 구출되서 이곳까지 이송된 이탈리아군 병사들)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뭐 만명 안팍의 현지주민과 300명의 이탈리아인만이 거주하는곳에 많은 병력도 필요없는데다가 적국이라고는 산둥반도의 독일군뿐이고 러시아, 일본등 아군은 널렸으니 충분히 이해가 될만도 하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dc95a63a9.jpg" width="474" height="16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dc95a63a9.jpg');" /></div> <div style="TEXT-ALIGN: center">&lt;텐진의 중국현지 징집병.&gt;<br></div>그런데 이게 무대리가 집권하면서 상황이 좀 바뀌기 시작했다. 무대리는 이 아시아 유일의 이탈리아식민지에 병력을 증파하기로 결정했고 1925년 3월, 정예부대로 손 꼽히는&nbsp;산 마르코연대에서 차출된 300명의 병력으로 Battaglione Italiano in Cina가 구성, 중국으로 파견된다.&nbsp;이 대대는&nbsp;&nbsp;산 마르코, 리비아, 산 조르지오라는 이름이 붙은 3개중대로-모두 전공을 세운&nbsp;군함의 이름에서 유례했다고 한다.-&nbsp;구성되었으며, 이들이 배치된 기지는 에르마노 칼롯토라고 명명되었는데, 의화단봉기에서 사망한 이탈리아군 장교의 이름을 쓴것이었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977e69b8.jpg" width="261" height="36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977e69b8.jpg');" /></div><br>무대리가 상당히 신경써서 엘리트부대를 배치한건 좋았지만... 결정적 문제는 이들이 할일이없었다는거였다. 중국과 이탈리아 양국 사이가 긴장선을 탄것도 아니고-손문이 이미 신해혁명때부터 열강 이권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표명한데다, 1930년대 중국정부는&nbsp;두명의 이탈리아인, 지벨로 소코와 에바리스토 카레티를 각각 철도부와 체신부의 감독관에 임명했다.뭐 , 분명 이시가 군벌들의 권력다툼과 북벌전쟁으로 인한 혼란기이긴 했고 1927년에는 국민당정부의 북벌로 고무된 민중들이&nbsp;영국의 조차지 두곳을 습격해 점거한적도 있지만 국민당정부가 알아서 돌려준데다 대부분의 조차지는 중국의 혼란과는 별도로 평온했다.-&nbsp;마적떼가 미쳤다고 조차지습격할것도 아니고...<br><br><br><br>결국 이들은 1930년대전반기까지 한거라곤 1928년4월 18일, 청왕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방문때 사열식을 한것과 치안업무빼곤 없었다. 이러한 평온함속에 이탈리아의 조계지는 꾸준히 성장했다. 1930년 무대리는 이 알짜배기땅에 자기 사위인 갈레아초 치아노를 베이징주재 공사 겸 상하이 조차지의 전권대사로 임명시켰다. 훗날 삼국동맹등 추축국들의 동명결성에 크게 이바지하게되는 그는 이곳에서도 자신의 재능을 살려 무솔리니와 장개석, 두 파시스트정권의 동맹을 돈독히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군부를 비롯한 국민당지도층에-장개석을 포함해서-&nbsp;이탈리아 파시스트정권에 우호적인 세력들을 심는데 성공했다. 치아노는 1932년 묵덴(혹은 센양이나 봉천으로 불리는)에서의 일본과 중국의 충돌에서도 중개자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장개석의 신뢰를 받았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a1b97475.jpg" width="222" height="22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a1b97475.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a6acbdb1.jpg" width="283" height="20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a6acbdb1.jpg');" /></div> <div style="TEXT-ALIGN: center">&lt;上-무솔리니의 사위, 갈레아조 치아노, 下-중국에 있던 시절의 갈레아조 치아노&gt;</div><br>1930년대 중반에는 양국간의 우호는 절정에 달했고 무솔리니는 Sm-79 프로토타입 6기와 그에 딸린 조종사, 기술지원팀, 교관을 장개석에서 우호의 선물로 보냈다.-재밌는건 비슷한 시기 히틀러 역시 자국군에도 배치안된 M35헬멧 30만개를 중국에 판매했다는건데, 유럽의 파시스트정권들이 중국에게 꽤 많은 호감을 가진 반증이라고도 볼수있겟다.&nbsp;이탈리아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공군기의 라이센스 생산 설비까지 제공해주려 했지만, 이것까지는 역시 힘들었다. 대신 중국은 이탈리아로부터&nbsp; Cr32, Ca101,Ca110, Ca133등 다양한 이탈리아 공군기를 추가로 구매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b9b7eb97.jpg" width="320" height="24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b9b7eb97.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bc502221.jpg" width="350" height="24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bc502221.jpg');" /></div><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bbbb9b1a.jpg" width="399" height="25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bbbb9b1a.jpg');" /></div><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bae4cd79.jpg" width="414" height="14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bae4cd79.jpg');"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be0d71ae.jpg" width="318" height="33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acbe0d71ae.jpg');" /></div> <div style="TEXT-ALIGN: center">&lt;맨위부터 sm79, Cr32, Ca101, Ca110, ca133. 중국군은 이외에도 독일로부터 He111을, 미국으로부터는 B10을 수입했고 1939년 이후에는 소련제까지 들여놨다.이로인한 혼란도 적진 않았을꺼다.&gt;</div><br>중국과 이탈리아, 무솔리니와 장개석 이두 파시스트간의 굳건한 동맹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았지만 1930년대중반을 지나면서 돌이킬수없게되버렸다. 1937년 9월 6일, 이탈리아는 독일, 일본과 함께 반공협정에 조인한것이다. 양국간의 관계는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br><br>독일-이탈리아-일본의 반공협정이 체결되기전인 1937년 6월 13일, 이미 일본의 공격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해 있는 상태였다.&nbsp;갑작스러운 교전국과의 동맹, 중국에게 이것은 이탈리아의 배신이었고&nbsp;이로서 이탈리아조차지들의 고립되었다. 상황의 급박함에 위기감을 느낀 조차지의 군 책임자이자 조차지의 파시스트당 대표인 카를로 푸마갈리는 병력들을 배치하고 본국에 추가병력과 군함증원을 부탁하는 한편 바시갈루피 함장의 포함 레판토와&nbsp; Battaglione Italiano in Cina를 규합해 급히 조차지 방어병력을 편성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b13d9095f1.jpg" width="350" height="18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b13d9095f1.jpg');" /></div> <div style="TEXT-ALIGN: center">&lt;텐진의 건보트, 레판토&gt;</div><br>이탈리아군사령부도 반공협정의 여파와 중일전쟁의 심화로 조차지가 위험해질것이라는것은 충분히 예상했었고 수백명의 증원병력과 함께 경순양함 레이몬도 몬테쿠콜리를 파견했다. 레이몬도 몬테쿠콜리는 9월 15일, 일본이 상하이에 폭격을 퍼붓기 시작한 그날이었다.중일전쟁의 전황은 날이 갈수록 격심해졌다. 이탈리아군은 텐진과 상하이의 자국민들을 보호하기위해 760여명의 병력인 Granatieri di Sardegna대대를 에디오피아의 마사우아에서 텐진으로 파견했다. 이제 총 1,200명의 이탈리아육해군 병력들이 텐진과 상하이에 주둔하게 되었다.&nbsp;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조차지의 거주민들 수보다 파견된 병력의 수가 훨씬 웃돌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텐진에 거주하던 이탈리아인이 500~600명, 상하이에 거주하는 인원은 42명이었다.&nbsp; 이점은 조차지에 병력을 파견했던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시기 영국과 미국도 조차지에 있는 자국민들을 보호하기위해 각각 2,500명과 1,400명의 벙력을 상하이에 파견했는데 상하이에 거주하는 영국인은 924명, 미국인은 308명이었다. -덤으로 199명의 자국민이 살고 있는 독일과 182명이 살고 있던 소련의 파견기록은 안보인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b1443bef09.jpg" width="500" height="301.8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b1443bef09.jpg');" /></div><br><div style="TEXT-ALIGN: center">&lt;레이몬도 몬테쿠콜리, 17세기 동명의 이탈리아 군인에서 함명을 따왔다.&gt;</div><br>서구 열강들이 상하이등, 조차지에 병력을 증파하는것과는 별도로 일본의 상하이공격은&nbsp;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그리고 급기야 9월 27일과 10월 24일, 일본군의 폭격기가 &nbsp;이탈리아군 경순양함 레이몬도 몬테쿠콜리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비록 파편에 의한것으로 의도적인게 아니었던 사건이지만 1명이 죽고 여러명이 부상당한 사건이었던 만큼 도쿄와 로마간에 외교라인은 긴장타기 시작했다.&nbsp;이탈리아는 일본에&nbsp;항의서한을 전달하는 한편, 12월 23일 손상된 레이몬도 몬테쿠롤리를 자매함 바르톨로메오 코레오니로 대체한다.&nbsp;독-이-일 동맹이 결성된지 1년도 되지않은 시점에서 위기가 다가온 것이다. <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b151b73a19.jpg" width="425" height="15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6/70/e0019270_488b151b73a19.jpg');" /></div> <div style="TEXT-ALIGN: center">&lt;레인몬도 몬테쿠콜리의 자매함,&nbsp; 바르톨로메오 코레오니&gt;<br><br></div>중국으로선 상당히 반가운 상황이었지만...&nbsp;이게 이탈리아와 일본의 돌이킬수없는 대립으로까지 빠자진 못했다. 양국간의 암묵적 거래가 있었는지, 혹은 독일이 중재에 나서줬는지, 이&nbsp;대립은 이탈리아가 양보하는 형태로 마무리지어졌다. 1939년 9월 5일, 바르토레오메 코레오니가 철수했고 이어 나머지 이탈리아군도 카롯토기지의 병력과 포함 레판토만 남기고 모두 철수했다. 1937년 이전의 수준으로 다시 돌아간것이다.<br><br>그러나 이탈리아군이 다시 돌아오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가 본격적으로 2차대전에 참전하자, 이탈리아해군 사령부는 다시 에디오피아의 마사우아에 있는&nbsp;부대들을 텐진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명목상으로는 텐진이 보호였는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영국군이 이탈리아령 소말리아를 점령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1941년 2월 에디오피아의 마사우아기지가 함락되긴 두달전, 이탈리아군은 식민선 에르트리아와 무장&nbsp;수송선 램브1,2에 병력을 담아 텐진을 향해 출발-사실상 도주-했다.&nbsp;그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상하이, 텐진 혹은 고베. 추축국이 통제하고 있는 항구에 어떻게든 도착하라!" 였다. 에르트리아와 램브2는 운좋게도 목적지에 도착할수있었지만, 램브1은 별로 운이 좋지 못했다. 그들은 몰디브 근해에서 순찰중인 뉴질랜드 해군의 경순양함 리앤더를 만나 침몰하고 말았다.<br><br>1941년 3월부터 1943년 9월까지, 이탈리아는 텐진과 상하이,베이징, 그리고 홍커우에서 조차권을 유지할수있었다. 이곳들이 일본군의 점령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 식충같은 데다가 -현지 지휘관의 표현대로- 영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불러올수있는 유럽인들을 쫒아내고 싶었지만 도쿄는 굳이 로마와의 또 한번의 마찰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기에 참아야만했다.&nbsp;이탈리아인들도 얹혀 사는 입장인 만큼 조용히&nbsp;살았다. 이탈리아인 조차지의 평온은 얼마동안은 계속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습격&nbsp;이전까지 말이다.<br><br>진주만 습격이후, 일본이 본격적으로 연합국들과의 전쟁에 나서게되자&nbsp;수많은 이탈리아의 잠수함들이 일본을 위한 전쟁물자를 실고 상하이와 텐진, 고베로&nbsp;향했다. 텐진의 이탈리아군들도 몇달만의 휴식을 깨고 다시 전선으로 나섰다.-그래봤자 보급이 주업무지만. 식민선 에르트리아는 이들 잠수함들의 중간보급의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영국해군이 이탈리아해군의 주요항구로 쓰이던 보르도항을 철저히 봉쇄한 탓에&nbsp;순탄치는 않았지만 이탈리아의 잠수함들은 꾸준히&nbsp;일본에 전쟁물자를&nbsp;조달했고, 고무와 퀴닌, 주석을 가지고 돌아왔다.<br><br>그러나 1943년 9월, 텐진의 이탈리아군은 가혹한 운명에 부딧치고 만다.<br>1943년 9월 8일 새벽 2시, 싱가폴-사방루트 사이에서 잠수함 카펠리니에 보급물자를 전달하던 식민선 에리트레아는 로이터통신을 통해 이탈리아의 항복소식을 듣게 된다. 에리트레아의 함장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어제까지 최후방이었던 이 지역이 이젠 적진 한가운데가 되버린것이었다. 에리트레아와 카펠리니는 즉시 항로를 변경해 수마트라를 지나쳐 전속력으로 실론섬을 향해 도망쳤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27/70/e0019270_488c08e571dd4.jpg" width="300" height="20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27/70/e0019270_488c08e571dd4.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lt;이탈리아군 식민선 에리트레아.&gt;</div><br>다른 이탈리아함선들도 이 갑작스러운 뉴스에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모두들 제각각이었다. 고베에서 수리중인 보조순양함 칼리테아2(수송선 램브2를 순양함으로 개수한 것이다.)와 상하이에 주둔중이던 증기선 콘트 베르데와 건보트 카롯토와 레판토는 일본군에게 항복하느니 자침을 택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7/70/e0019270_488c0913cc9e4.jpg" width="345" height="10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7/70/e0019270_488c0913cc9e4.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lt;개수전의 수송선 램브2&gt;</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7/70/e0019270_488c0abb29dbd.jpg" width="315" height="147"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7/70/e0019270_488c0abb29dbd.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lt;건보트 카롯토&gt;<br></div>보르도를 출발해 텐진으로 향하던 잠수함 카그니는 인도양을 지나던 도중 항복소식을 접했고 그대로 남아프리카의 더반으로 가서 연합군에게 항복했다.<br><br>싱가폴에서 화물을 적재중이던 잠수함 줄리아니와 톨레리, 사방에 정박중이던 카펠리니는 계속 일본군과 함께 연합군에 대항해 싸우기로 결심했지만, 일본군은 이들의 투항을 받아들이는척하면서 포로수용소에 가두었다. <br><br>이런 일본군의 배신행각도 있긴했지만 적지 않은 수의 이탈리아해군은 그대로 필리핀 패낭의 독일군유보트사령부의 지휘하에서 전쟁을 지속했다. <br><br>1945년 5월 8일, 독일의 항복 이후에는 또다시 20여명의 수병이 일본해군과 합류해 전쟁을 지속했다. 잠수함 톨레리는 일본항복이후인 1945년 8월 30일, 미군의 B-25를 대공기관포로 격추시켜 추축국의 마지막 '승리'를 장식했다.연합군을 상대로 태평양에서 최후순간의 승리를 쟁취한건 이탈리아 잠수함이었던것이다.-태평양전선뿐만 아니라 2차대전 통틀어서 마지막 성과가 아니었을까?<br><br>이탈리아의 항복은 육군에게도 비껴갈수없는 상황이었다. 일본군병력 1000여명이 15대의 경전차와 몇문의 화포지원을 받으며 이탈리아군이 점거하고 있는 베이징의 라디오방송국을 포위, 공격해 들어왔다. 해군 중령 발다살레 휘하의 이탈리아군 100명은 일본군의 공격을 하루이상 버티다가 모둔 설비와 기밀문서를 파괴한뒤 9월 10일 오전 9시에 일본군에게 항복했다. 교전후 29명의 장교와 병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원이 계속 추축국의 일원으로 싸우길 원했지만 일본은 이들을 모두 조선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보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7/70/e0019270_488c0b798cf46.jpg" width="325" height="20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7/70/e0019270_488c0b798cf46.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lt;1939년, 텐진의 이탈리아군&gt;<br></div><br>텐진의 이탈리아군도 타나카중령이 지휘하는 일본 육군 6,000여명의 병력과 10여대의 경장갑차량에게 포위되었다. 이탈리아에선 나름 정예로 통했던 산 마르코연대출신의 병사들이 중심이된 600명의 병력들과 텐진주재 이탈리아영사 스테파넬리는 일본이 난징과 기타 중국의 도시에서 무슨짓을 했는지 아주 잘알고 있었고, 텐진이 함락될시 똑같은 참극이 벌어질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군은 1주분 이상의 식량과 탄약을 가지고 있었고 이걸로 어떻게든 버텨보면서 주변 연합군의 도움을 기대볼생각이었다.<br>-혹은 텐진의 중립화라던가.<br><br>타나카중령은 이탈리아군이 잘 훈련되고 무장되어있으며 쉽게 항복하지 않을것이라는것을 알았다. 그는 두정의 건보트를 강을 따라 텐진 인근으로 접근시켰고, 베이징의 공항에 폭격을 요청했다. 타나카의 포병들이 텐진을 향해 위협 사격을 가한지 얼마안되어 전차와 야포를 갖춘 1개사단급의 일본군이 텐진으로 접근중이라는 소식이 이탈리아군에게도 들려왔다. <br>이 압도적인 화력의 일본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는 이탈리아군 지휘관 카를로 델 아쿠아의 항전 의지를 제고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게 항복했다. <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27/70/e0019270_488c0bbf2a573.jpg" width="183" height="2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27/70/e0019270_488c0bbf2a573.jpg');" /></div><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27/70/e0019270_488c0c1a5bd2d.jpg" width="300" height="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27/70/e0019270_488c0c1a5bd2d.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lt;이탈리아중국주둔군의 모체가된 산 마르코연대의 병사와 부대기<br>산 마르코 연대는 1차대전 당시에는 베니스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2차대전 당시에는 최초로 베니스를 해방시킨 연합군부대로 이탈리아군에서는 꽤 엘리트로 통한다&gt;</div><br>일본군의 포로가된 텐진주둔군은 전체 600명중에서 170명만이 추축국가담을 선택했고, 나머지 병력들은 종전때까지 조선과 일본의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br><br>일본에 대한 협조 불응으로 포로가 되었던 이탈리아군들은 연합군이 차례 차례, 포로수용소를 점령함에 따라 해방되었다. <br>1946년 3월, 파시트와 반 파시스트 모두를 포함한 마지막 이탈리아군을 미 해군 함선이 나폴리로 수송함으로서, 극동지역에서 이탈리아군은 근 반세기만에 자취를 감췄다.<b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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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side of history</category>
		<pubDate>Wed, 30 Jul 2008 12:21:29 GMT</pubDate>
		<dc:creator>Cicero</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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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우리 옆집에 나치가 산다?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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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홀로사는 노인과 그와 친분을 쌓는 소년.<br>둘은 오랜시간을 함께하고 노인은 자신과 함께 보낸 시간때문에 성적이 떨어진 소년을 위해 <br>소년의 조부연기까지하며 그를 돕는다.<br>플롯만 보면 영화전면에 잔잔한 음악이&nbsp;흐르고, 노인과 소년이 마주보며 웃는&nbsp;<br>이런 영화를 생각하기 쉽지만&nbsp;<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24/70/e0019270_488873e368a88.jpg" width="334" height="45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24/70/e0019270_488873e368a88.jpg');" /></div><br><br><br>이영화의 포스터는 이쪽이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4/70/e0019270_4888739c152ea.jpg" width="334" height="4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4/70/e0019270_4888739c152ea.jpg');" /></div>&nbsp;어떤가? 음험한 스릴러의 기운이 감돌지 않는가?<br>그도 그럴것이 이 영화는 스릴러의 거장,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고<br>스토리상 노인과 소년의 관계를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건 '협박'이니까<br><br>이쯤에서 잠깐 스토리를 볼까?<br>"주인공인 토드 돈슨은 학교에서 배운 홀로코스트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많은 자료들을 찾아 다닌다. <br>그러던 중 토드는 이웃에 사는 노인&nbsp;아서 덴커가 유대인학살로 수배중인 전범 쿠르트 두센더라는것을 알게되고, 토드는 그를 협박해 더많은 홀로코스트의 진상을 알고자 한다. <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24/70/e0019270_48887570aafbe.jpg" width="500" height="21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24/70/e0019270_48887570aafbe.jpg');" /></div>이렇게 나이먹을 만치 먹은 사람 잡아다가 밀덕 코스프레까지시키고, 욕질까지 해댄다.<br>그러나 토드는 아서의 얘기를 들을수록 환각과 악몽, 성격파탄에 급기야 발기부전(...)에 성적하락으로까지 이어지고, 쿠르트 역시 서서히 자신이 잊고 지내던 친위대시절에 대해 눈떠가기 시작한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24/70/e0019270_488876d1e332c.jpg" width="500" height="21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24/70/e0019270_488876d1e332c.jpg');" /></div><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4/70/e0019270_488877516e9ae.jpg" width="500" height="21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4/70/e0019270_488877516e9ae.jpg');" /></div><br>급기야 토드는 성작하락으로 부모님모셔오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고성적하락의 원인이 밝혀지는것을 막기위해 아서는 토드의 조부인것처럼 연기해 위기를 넘기고 그동안 토드와 자신사이에 일을 기록한 일지를 빌미로 이제까지의 관계청산을 요구하는데..."<br><br>둘의 관계는 협박으로 탄생했고 협박으로 유지되다가 협박으로 종결된다.<br>그리고 그 협박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느냐로 이어진다. 토드는 초반에 쿠르트의 비밀로 협박을 가하고 그를 지배한다.&nbsp;<br>그러나&nbsp;점차 협박의 결과는&nbsp;도리어 토드에게 위협으로 다가오고 급기야 두사람의 지배관계까지 뒤엎는다.<br><br>결국 협박으로 만들어진 두사람의 관계는 누가 누구를 지배하느냐의 관계에서 발전하지 못한다.<br>뭐 영화도중 쿠르트가 토드네 집 저녁식사에 초대받은 장면이라든가,&nbsp;토드가 다시 상위권 성적을 회복하자 쿠르트가 기뻐하며 요리하는 장면, 그리고 병원에서 쿠르트와 토드의 마지막 대면장면등을 보면 영화가 드라마와 스릴러의 경계를 오가며 살짝 드라마가 될것처럼도 굴지만... 글쎄? 결국 스릴러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것때문인지 몰라도 뇌입원 영화정보에 드라마, 스릴러로 공동표시해놨다.<br><br>뭐 특별히 남는건 없지만 노인과 소년의 협박에 기반한 권력관계의 밀고 댕기기. <br>그리고 이안 멕켈렌이 잊었던 친위대시절의 광기를 찾아가는 모습이 꽤 볼만한 영화.<br>-근데 이안 멕켈렌,&nbsp;메그니토는 언제 개봉할 생각이야?<br><br>그런데 이영화대로 만약에 이웃집 노인이 알고보니 수배중인 전범이라면 당신은 뭘 할것인가?<br><br>뭐 영화처럼, 협박해본다도 가능하겠지만.... 난 그냥 신고할련다.<br><br><div class="viewmail-attach"><a class="file_name" href="http://bigmail13.mail.daum.net/Mail-bin/bigfile_down?uid=QPKo5J8Yvq3aB-NPveQDXXheLOn9.M.E" type="daum">죽..음..보..다..무..서..운..비..밀..2.smi</a> <!--/hanmail/DATA_ROOT/20080724/61/39/69/2206--><!--bigmail13.mail.daum.net--><span class="file_size">(40 KB)</span> <a class="file_store" href="http://bigmail13.mail.daum.net/Mail-bin/bigfile_down?uid=QPKo5J8Yvq49MHHpRQooxi1sxe9nSaxr">PC저장</a> </div><div class="viewmail-attach"><a class="file_name" href="http://bigmail13.mail.daum.net/Mail-bin/bigfile_down?uid=4lot.RaH.1L.8mygjciWCW8XoQEBHFD_" type="daum">죽..음..보..다..무..서..운..비..밀..1.avi</a> <!--/hanmail/DATA_ROOT/20080724/61/40/86/7485--><!--bigmail13.mail.daum.net--><span class="file_size">(717226 KB)</span> <a class="file_store" href="http://bigmail13.mail.daum.net/Mail-bin/bigfile_down?uid=4lot.RaH.1JcO-hir7xMXetL9v5nLYr7">PC저장</a> </div><div class="viewmail-attach"><a class="file_name" href="http://bigmail13.mail.daum.net/Mail-bin/bigfile_down?uid=-FHikwNeaSmIqJkZNQrEWp4KPo.DpUDy" type="daum">죽..음..보..다..무..서..운..비..밀..1.smi</a> <!--/hanmail/DATA_ROOT/20080724/18/85/70/3749--><!--bigmail13.mail.daum.net--><span class="file_size">(46 KB)</span> <a class="file_store" href="http://bigmail13.mail.daum.net/Mail-bin/bigfile_down?uid=-FHikwNeaSnlMW3DN.eDx3dHYvS8Yjtu">PC저장</a> </div><div class="viewmail-attach"><a class="file_name" href="http://bigmail13.mail.daum.net/Mail-bin/bigfile_down?uid=wabOYWGeEP2MoC.JxKCN-BbvBXmwYNVc" type="daum">죽..음..보..다..무..서..운..비..밀..2.avi</a> <!--/hanmail/DATA_ROOT/20080724/65/64/78/2007--><!--bigmail13.mail.daum.net--><span class="file_size">(717352 KB)</span> <a class="file_store" href="http://bigmail13.mail.daum.net/Mail-bin/bigfile_down?uid=wabOYWGeEP4T6O3ip-I5o2Z.2pXXdKdF">PC저장</a> <br></d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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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미분류</category>
		<pubDate>Thu, 24 Jul 2008 12:52:40 GMT</pubDate>
		<dc:creator>Cicero</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한스 애르빈 로우터 습격사건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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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독일의 네덜란드통치기간동안 네덜란드의 치안책임자였던 한스 에르빈 로우터는 그 잔학성으로 네덜란드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는 나치스가 네덜란드를 지배하는 동안 11만명의 네덜란드계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냈으며, 30만명의 네덜란드인을 독일로 끌고가 강제 노역 시켰다. 또한 그는 1941년 2월, 네덜란드의 반 나치스파업 당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유혈진압을 벌인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는&nbsp;수많은 파업 관련자들을 즉결처형시켰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23/70/e0019270_48867fe5d4648.jpg" width="150" height="20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23/70/e0019270_48867fe5d4648.jp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23/70/e0019270_488680894b80b.jpg" width="150" height="19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23/70/e0019270_488680894b80b.jpg');" /></div><br>&lt;한스 에르빈 로우터, 치안책임자란 작자가 치안보다 억압에 더많은 신경을 쓰는 모습이 어디 사는 누구랑 많이 닮았다.&gt;<br></div><p><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23/70/e0019270_48867f4d2721b.jpg" width="450" height="60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23/70/e0019270_48867f4d2721b.jp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lt;암스테르담의 2월 파업기념비&gt;</div><p><br>이러한 그의 악랄한 점령정책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저항세력은 그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나치스의 잔인한 보복정책때문이었다. 나치스는 그들이 점령한 지역내에서 자신들의 고위관료가 공격받을 경우, 잔인한 보복으로 대응해 왔다.<br>한 예로 1942년 체코에서 독일의&nbsp;총독인 하이드리히가 암살당했을때, 그들은 보복으로 리디체마을을 초토화시키고 그곳 주민 172명을 살해했다.이런 까닭에 네덜란드의 저항세력들은 나치스고관에 대한 암살을 금지시키고 있었다.<br><br>그러나 한스는 아주 우연하게도, 정말이지 우연이라고 밖에 표현할길 없는 계기로 레지스탕스의 습격을 받게 되었고, 그게 그의 인생의 종막을 결정짖고 말았다. <br><br>1945년 3월의 어느날 밤, 4명의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들이 보에스테 호에베 근교의 펠루베숲에서 SS로 위장한체 차량검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2명의 네덜란드인과 다른 2명의 전직SS인 오스트리아인들이 이런 준비를 하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돼지 고기때문이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3/70/e0019270_488680c0b149e.jpg" width="367" height="460"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3/70/e0019270_488680c0b149e.jp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lt;한스는 돼지고기로, 또다른 누구씨는 쇠고기로 위기 몰렸다.&gt;</div><p><br>이들은 다음날, 독일점령군이 수톤에 이르는 돼지고기를 지역내 정육점에서 수령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nbsp;레지스탕스들은 독일군으로 위장해 독일군보다 먼저 정육점에 도착해 돼지고기를 가로챌 예정이었다. 독일군연기를 해줄 두명의 전직 SS와 SS제복... 대부분의 준비는 갖춰졌지만 결정적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돼지고기를 운반할 차가 없었다! 이들이&nbsp;계획을 세우기 얼마전 그들의 가진 마지막 차량이 독일군의 습격으로 파괴된것이다!<br><br>결국 그들은 돼지고기를 가로채기전에 차부터 확보해야했다. 그래서 그들은 펠루베숲에서 검문을 빙자해 차량을 징발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날밤 그들이 세운 검문소에 모습을 드러낸건 한스의 차였다.&nbsp;<br><br>레지스탕스는 그차가 누구의 차인지 몰랐고, 한스가 얼마전 독일군들에게 내린 명령이 뭐였는지도 몰랐다. 한스는 독일군용차량은 검문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덕분에 한스는 아무 생각없이 검문소에서 멈추지 않고 통과하려했다. <br><br>레지스탕스는 순간 당황했다. 그들은 놀라 한스의 차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결국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한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망했다. 한스도 심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됬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6.egloos.com/pds/200807/23/70/e0019270_48868127b9581.jpg" width="500" height="376.08069164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6.egloos.com/pds/200807/23/70/e0019270_48868127b9581.jp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lt;공격당한뒤의 한스의 차&gt;</div><p><br>한스가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은 곧 히믈러에게 보고되었고, 히믈러는 또다시 잔악한 보복을 자행했다. 그는 네덜란드 민간인 500명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SS는 암스테르담에서 70명을, 아펠도른과 아른헴에서 117명을 살해했다.<br><br>이후 한스는 병원에서 종전을 맞았고, 그곳에서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는데, 그는 최후까지도 자신의 전쟁범죄를 부정하려 애썼다. 결국 그는 1949년3월 24일 총살당했으며, 그가 묻힌 장소는 오늘날까지 기밀로 유지되고 있다.<br><br>ㅡㅡㅡㅡㅡㅡ<br>그냥 요새 시간을 거꾸로 달리는 모국의 경찰 총책이란 사람이 하는 꼬락서니보니까 생각나서 적어본 글...</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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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side of history</category>
		<pubDate>Wed, 23 Jul 2008 00:57:13 GMT</pubDate>
		<dc:creator>Cicero</dc:creator>
	</item>
	<item>
		<title><![CDATA[ 탈리-이한탈라전투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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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ATA[ 
  <p>핀란드영화 탈리-이한틸라1944 감상기념 포스팅.<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13/70/e0019270_487960b989226.jpg" width="350" height="49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13/70/e0019270_487960b989226.jpg');" /></div><br>------<br>1944년, 3년 가까이 고통속에 신음하던 혁명의 도시 레닌그라드의 포위를 분쇄한 붉은 군대는이웃의 작지만 성가신 핀란드와의 질긴 악연을 끝내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br>&nbsp;<br>6월 9일, 소련은 연합군의 노르망디상륙에 맞춰 칼레리안 지협에 대해&nbsp;3개 군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26만여명의 병력과 1000여대의 항공기, 7500문이상의 화포와 600여대의 기갑차량이 동원된 이 공세앞에&nbsp;하루만인 6월 10일, 핀란드군은&nbsp;1차방위선인 발케사리섬을 포기해야 했고 바멜스와 타메팔리에 제2의 방어선을 구축했다.(V-T라인)<br><br>하지만 그마저도 &nbsp;6월 14일, 붉은 군대는&nbsp;사하킬라와 쿠터셀카를 점령하면서&nbsp;돌당파했다. 핀란드군은 기갑사단을 동원해 쿠터셀카를 수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핀란드군은 기존의 V-T라인을 포기하고 바이푸리-쿠파르사리-타이팔레로 이어지는 3차방위선을 구축했다. (V-K-T라인)<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10/70/e0019270_48761775e01fe.png" width="500" height="36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10/70/e0019270_48761775e01fe.png');" /></div><br>핀란드군의 전황은 날이갈수록 심각해졌다. V-T라인을 포기한지 불과 1주일도 지나지 않은 6월 20일, 붉은 군대는 짧은 교전 끝에 바이푸리마저 점령했다. V-K-T라인마저 포기해야될 상황에 몰린 것이다. 핀란드는 다시 후퇴해서 방어선을 재구성하든지, 아니면 기존의 V-K-T라인을 사수할것인지 선택해야 했다.&nbsp;<br><br>"더이상 후퇴는 없다!"<br><br>만네르하임은 기존 V-K-T라인의 사수를 택했다.&nbsp;<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10/70/e0019270_48761db975c27.jpg" width="378" height="59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10/70/e0019270_48761db975c27.jp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lt;핀란드의 만네르하임 원수. 대통령은 따로 있는데&nbsp;2차대전때 핀란드하면 모두 이사람을 떠올린다.&gt;</div><p><br>&nbsp;6월 12일, 핀란드는 동맹국인 독일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독일은 핀란드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고 쿠루트 쿨메이가 이끄는 루프트 바페 비행대와 303돌격포여단과 122사단, 그리고 대량의 판저 파우스트를 보냈다.&nbsp;소련군의 공세규모를 생각할때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지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303돌격포여단은 말이 여단이 대대급병력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독일도 그이상 지원할 역량이 없었다.&nbsp;동부와 서부, 모든 전선에서 연합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고 있었기에 그걸 막는것만으로도 힘이 부치고 있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10/70/e0019270_487617a418f4b.jpg" width="397" height="28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10/70/e0019270_487617a418f4b.jp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lt;어떤 의미에서 판저 파우스트는 독일이 핀란드에게 보낸 최고의 지원이었다. &gt;<br><br></div><p>동맹국의 빈약한 지원과 압도적인 힘의 침공군.&nbsp;&nbsp;핀란드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핀란드는 소련에게 자비를 구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소련과 평화협상을 맺고 싶었지만 모스크바의 반응은 냉담했다.<br><br>"무조건 항복이외에는 그어떤 평화협상도 없다!"<br><br>평화협상이 결렬되었고 다음날 6월 22일, 리벤트로프가 핀란드 대통령 리스토 리티를 방문했다. 리벤트로프가 전한 히틀러의 메세지는 다음과 같았다.<br><br>"만약 핀란드가 독일의 군사지원을 계속받고 싶다면 소련과 계속 싸우시오."<br><br>리스토 대통령은 핀란드가 계속 독일과 함께 싸울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약속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10/70/e0019270_48761d35a61b1.gif" width="199" height="27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10/70/e0019270_48761d35a61b1.gif');"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lt;리스토 리티 핀란드 대통령. 참 기구하고 힘든시기를 대통령으로 보냈다.&gt;</div><p><br>그리고&nbsp;마침내, 소련군은 바이푸리 남쪽에 자리잡은 '탈리'마을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br><br>소련군의 탈리 공격은&nbsp;병력에서는 5만대 15만으로 3배이상 우위에 있었고, 포병전력에서는 핀란드가 268문의 화포를 동원한데 비해 소련은 그 20배가 넘는 화력을 투입했다.게다가 폭격기 400여대와 전투기 600여대라는 압도적인 항공전력도 동원했다.그리고 침공군에는 소련군의 정예라 할수 있는 제30근위군단까지 포함되어 있었다.<br><br>겨울전쟁때와는 비교도 되지않는 핀란드의 국운을 건 전투가 다시한번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br><br><br>6월 20일, 소련군 제 97, 109군단과 152 전차여단이 탈리를 향해 진격해들어갔다. 방어하고 있던 핀란드군은 18사단과 3여단, 13연대 3대대였다. 부대 명칭에서 보면 짐작할수있겠지만 2차례에 걸친 방어선 붕괴로 되는 대로 급 조달한 부대였다. 재밌는건 13연대가 핀란드에 거주하는 스웨덴어사용자로 구성된 부대였던 탓에 일부 자료에서는 스웨덴정부가 직간접적으로 지원을 보냈다는 증거로도 언급된다.-하지만 이미 겨울전쟁때부터 의용군형식으로 스웨덴이나 기타 주변국인들이 참전하고 있었으니 무조건 그렇게 보기도 힘들다. <br><br>대충 이런 상황이다보니 소련군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방어선이 붕괴될것이라고 확신했다. 철저한 우위에 있는 화력과 공중지원, 그리고 병력.&nbsp;&nbsp;탈리가 함락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br><br>그러나 핀란드군은6월 24일, &nbsp;증원 병력이 올때까지 버티는데 성공했다.&nbsp;결국 소련군의 1차 탈리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br>&nbsp;<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11/70/e0019270_48772e9146395.jpg" width="500" height="456.33971291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11/70/e0019270_48772e9146395.jp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lt;정가운데 지점에 있는 호수가 문제의 레이티모야비호수다.&gt;<br><br></div><p>6월 25일, 오전 6시30분. 소련군을 귀를 찢는 듯한 대규모 포격으로 아침을 열었다. 탈리 공격을 위해 준비한 수천여문의 야포들이 불을 뿜었다. 1시간뒤인 7시30분, 소련군은 다시 한번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6월 28일까지 탈리마을 후방으로의 돌파를 목표로 잡고 있었다. 이번 공세에는 제30근위군단이 새로 합류했다. 소련군은 레이티모야비호수의 양쪽끝을 돌파할 계획이었다. 호수의 동쪽끝의 소련군 핀란드4사단에 의해 서쪽보다 3Km가량 뒤져 있었다.서쪽의&nbsp;45근위사단과 109군단의 보병들은 &nbsp; 핀란드군 48연대가 방어중인 Konkkalanvuoret 언덕을 장악하기위해 공격을 퍼부었고 소련군 27전차연대는 방어선을 돌파해 포르틴호이카의 교차로에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11/70/e0019270_48772e188b59f.jpg" width="500" height="456.339712919"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11/70/e0019270_48772e188b59f.jpg');" /></div>&lt;위성 사진으로 본 현재의 포르틴호이카교차로. 소련군 27전차연대는 탈리공방전에서 최초로 이곳까지 돌파했지만 전멸당했다.&gt;<br><br>소련군 178사단도 핀란드군 6연대가 방어중인 자르엘라 지협을 공격했지만 완강한 저항과 지형적 불리함으로 후퇴해야만했다. 그리고 그사이 97군단도 핀란드군 3여단 방어지역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지만 아주 불과 몇마일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br><br>이쯤에서 잠깐 돌아보면 핀란드군이 화력과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잘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붉은 군대는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핀란드군의 진영을 분단시키고 고립시키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친란드군이 조각조각나 각개격파당할것이 뻔했다. 겨울전쟁때 자신들에게 소련군에게 했던 방식처럼! 만네르하임으로서는 가장 두려운 일이었고, 탈리공격을 주도하던 소련군의 드미트리 N. 구세프 장군으로선 이전같은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라서 아쉽긴하지만 노리던 바였다. <br><br>"당장 증원군을 마련해서 투입하라!"<br><br>만네르하임은 예비전력들을 긁어모았다. 18사단의 예비대와 17사단의 일부와 4사단의 일부 가용병력이 긴급히 투입되었다. 오후가 지나자 핀란드는 기갑사단을 추가로 증파해 소련군을 뒤로 물리는데 성공했다. 가정 멀리 진출했던 소련군 27전차연대는 전멸하고 말았고 6대의 전차가 핀란드군에게 노획되었다.붉은 군대의 두번째 공격은 그렇게 실패했다.<br><br>순식간에 방어선이 또다시 분쇄당할 뻔한 핀란드군은 탈리 전역에 다시 병력을 투입했다. 각지에서 긁어모은 핀란드군병력이 증파되었고 독일군303 돌격포여단이 마침내 도착했다. 새로 증파된 핀란드군은 구멍난 모든 전선에 골고루 뿌려졌다. 그래봤자 그러 넓지 않은 지역이었기에 병력의 밀집도는 상당부분 유지될수있었다. 핀란드군이 버틸수 있었던 이유중에는 이런 지형적이점도 한몫했었다. 방어병력을 확충한 핀란드군은 브요크만과 푸로마라는 두개의 그룹으로 재편성되었다.&nbsp;소련역시 병력을 충원했다. 지난번 30근위군단에 이어 108군단이 추가되었다. <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11/70/e0019270_4877302281bbb.jpg" width="500" height="33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11/70/e0019270_4877302281bbb.jp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lt;핀란드에 도착한 303돌격포여단. 말이 여단이지 대대급병력이었다.&gt;</div><p><br>이번에는 핀란드군이 먼저 공세에 나섰다. 그들은 아직도 레이모야비호수 동쪽에 진출해 있는데 소련군을 향해 공격에 나섰다. 핀란드군의 이들 붉은 군대를 세방향에서 공격을 가해 겨울전쟁때처럼 장작패서 괴멸 시킬 생각이었다. <br>그러나 핀란드군의 오판도 도를 넘어선 오판이었다. 붉은 군대는 겨울전쟁 당시의 붉은 군대가 아니었고 이지역 붉은 군대전력의 핵심은 근위사단들이었다!-46,63.64근위사단과 268사단, 30근위전차사단등. 결국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견고하게 필사적인 그리고 압도적인 화력의 지원을 받는 방어덕에 장작패기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br>하지만 핀란드군의 이공격의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진행된 72시간동안 핀란드군 6사단과 11사단이 새로 전장에 배치되었다. <br><br>치열한것은 지상뿐만이 아니었다. 양측의 공중전도 치열했다. 소련군 276폭격비행대의 경우, 탈리전투동안 1300여회의 출격했다고 한다.<br><br>6월 28일 탈리 방어전을 책임지던 핀란드군의 칼 레난트 애쉬장군은 중요한 결단을 내린다. <br><br>"제군들, 지금까지 잘싸워주었다. 그러나 더이상 이곳에서 소련군을 막는것은 무리다.탈리를 포기한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11/70/e0019270_48772c7a0915d.jpg" width="382" height="558"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11/70/e0019270_48772c7a0915d.jpg');" /></div></p><div style="TEXT-ALIGN: center">&lt;칼 레난트 에쉬장군. 아버지가 체스보드만드는 장인에 조상은 스위스인인 독특한 집안출신이었다.&gt;</div><p><br>확실히 핀란드군은 탈리를 사수하면서 군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벌수는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탈리에서 소련군을 막아낼수는 없었다. 다른 핀란드군들이 재전개되는 상황에 언제까지 탈리에 매달릴 필요는 없었다.<br><br>그러나 6월 29일. 소련군은 다시한번 공세에 나섰다. 퇴각준비를 하던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대규모공세앞에 철저히 유린당했다. 핀란드군은 끔찍한 피해를 입으며 탈리를 사수했지만 이날 은핀란드군 사상 최악의 날로 기록되었다.<br>&nbsp;<br>6월 30일. 핀란드군은 마침내 탈리에서 후퇴했다. 그들이 후퇴하는 와중에도 소련군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7월1일과 2일, 이틀동안 핀란드군은 평균 800명의 사망자를 기록했다.<br><br>그러나 핀란드군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한탈라에서 다시 한번 방어전을 준비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11/70/e0019270_487730875159e.jpg" width="429" height="27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11/70/e0019270_487730875159e.jpg');" /></div></p><br><br><br>&nbsp;<br>7월 2일, 핀란드군은 이한탈라에 대한 공세를 준비하는 소련군의 통신을 감청했다. 7월 3일 오전 4시에소련군 63사단과 30기갑여단이 공격에 나설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결정적인 정보의 유출로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공세에 대비할수있었고, 다음날 오전 3시 58분. 소련군의 공세 예정시각 2분전에 40대의 핀란드와 독일의 폭격기들 공세를 준비하고 있던 소련군을 덮쳤다. 이어서 250여개의 핀란드군야포들고 4000여발의 포탄을 소련군에게 퍼부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12/70/e0019270_48784e3681910.jpg" width="370" height="361"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12/70/e0019270_48784e3681910.jpg');" /></div><br>갑작스런 적의 역공세에 당황했지만 소련군은 이대로 물러설수 없었다. 같은 날 오전 6시, 소련군 폭격기 200여대가 공습에 나섰고, 지상군의 공격도 이어졌다. 그러나 이한탈라에서 방어전이 재개되었을때, 핀란드군은 탈리에서 시간을 끌었던 덕분에 꽤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진행할수있었다. 핀란드군은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야포의 절반을 이지역에 투입했고 독일군 303돌격포여단도 본격적인 전투에 나섯다. 그리고 독일이 보낸 기적의 난로연통 판저파우스트가 대량 지급되었다. 결국 오후7시, 핀란드는 이한탈라전역의 방어선을 완전히 회복했다.<br><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12/70/e0019270_48784d74ebe60.jpg" width="300" height="332"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12/70/e0019270_48784d74ebe60.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lt;경계를 취하는 핀란드군 병사&gt;</div><br>구세프는 다시한번 공세를 명령했다. 그리고 이어진 공세에서 소련군은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7월 6일, 핀란드군 6사단 18포병대대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몇km를 추가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날 핀란드군은 붉은 군대를 퇴각시켰고, 소련군 오후 1시와 7시에 다시 공격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br><br>잊달은 공세의 실패는 모스크바를 실망시키기 충분했다. 7월 7일, 스타브카는 30근위군단을 에스토니아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독일진공작전에 투입할 정예병력을 핀란드에서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7월 9일이 되자, 소련군에 의한 방어선 돌파시도는 중단되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12/70/e0019270_48784ebf57711.jpg" width="500" height="31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12/70/e0019270_48784ebf57711.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lt;핀란드군 삼돌이 G형&gt;</div><br>탈리-이한탈라전투는 그렇게 종결되었다.<br>이전투에서 핀란드군은 8,561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소련군은 1.5000에서 2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것도 축소된 수치라는 주장도 있지만.<br><br>1944년 여름이 끝날때쯤이 되자, 핀란드군은 카렐리안 지협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이어 가을에는 양측의 평화협상이 진행되었고 핀란드군은 탈리-이한틸라전역의 결과로 무조건 항복은 피할수있었다. 1944년 9월 4일 오전 7시를 양측의 교전중지명령이 발효되었고 이어 19일에는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br><br>탈리-이한틸라전투에서 핀란드군이 소련군을 상대로 버틸수있었던것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적으로 카렐리안 지협의 좁은 지형이 붉은 군대의 숫적 우위를 발휘하기에 충분치 못했으며, 6월초의 소련의 압도적전황으로 인한 소련군의 오만과 그에 대한 오판, 그리고 비교적 빠른진격에 보급선이 따라와 주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 였다. <br><br>거기에 수시로 뚫려버린 소련군의 통신체계로 소련군의 움직임이 핀란드군에게 노출되었으며, 핀란드군이 택한 게릴라전략도-후퇴대열에 합류못한 부대들은 그자리에 숨어있다가 아군공세가 시작되면 적을 후방에서 공격하라.-상당히 유효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12/70/e0019270_48784d99e3035.jpg" width="500" height="322.5"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12/70/e0019270_48784d99e3035.jpg');" /></div><div style="TEXT-ALIGN: center">&lt;판저파우스트를 들고 경계를 취하는 핀란드군&gt;</div><br>그리고 마지막으로 핀란드군 포병대의 분투도 들수있겠다. 포병하면 소련인데 어디서 핀란드포병따위가 나올수있겠냐는 지적도 가능하겠지만 빌호 페터 네노넨이 지도한 핀란드포병대는 전장을 지배는 붉은 군대의 포병대에 대비해 잘 싸워주었다. 그야말로 지축을 뒤흔드는 소련군 포병대와는 달리, 이들 핀란드포병대는 일선부대와 연계하여 빠르고 정확하게 포격을 가하는 방식을 택했고 이게 탈리-이한탈라전역에서 '상당히'유효했다.<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8.egloos.com/pds/200807/12/70/e0019270_48784d0ec917a.gif" width="444" height="624"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8.egloos.com/pds/200807/12/70/e0019270_48784d0ec917a.gif');" /></div><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12/70/e0019270_48784e6da71d2.jpg" width="350" height="206"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12/70/e0019270_48784e6da71d2.jpg');" /></div><br><div style="TEXT-ALIGN: center">&lt;上-빌호 페터 네노넨장군. 포병전력에서 20배가량 우위를 확보한 소련군을 상대로 분투했다.<br>下-탈리-이한틸라전역의 핀란드군 포병대.&gt;<br><br><br><div style="TEXT-ALIGN: left">이밑으로는 그냥 덤<br>----------<br>말이 나와서 말인데,&nbsp;일본만화작가(코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가 영향이 된건지 소련군 근위대하면 전투력보다는 정치적 상징성에 맞춰서 구성된 사단이라 소련각지에서 차출된 민족으로 구성되 서로 말도 안통하는 부대인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있다. 나도 옛날에 한번 낚였었는데, 소련군 근위대란게 그렇게 만만하게 볼 부대는 아니다. 일단 이들 근위대는 붉은 군대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인 1941년 모스크바공방전 당시 독일군을 상대로 승리한 몇개 보병사단들을 근위사단으로 승격시킨게 첫 시작이었다. <br><div style="text-align:center"><img class="image_mid" border="0" onmouseover="this.style.cursor='pointer'" alt="" src="http://pds9.egloos.com/pds/200807/10/70/e0019270_48761c212730c.jpg" width="140" height="173" onclick="Control.Modal.openDialog(this, event, 'http://pds9.egloos.com/pds/200807/10/70/e0019270_48761c212730c.jpg');" /></div> <div style="TEXT-ALIGN: center">&lt;소련군 근위대 뱃지&gt;</div><p><br>이후 항공, 전차등 다양한 병과의 근위대가 창설되었는데, 이들 병력은 소련각지에서&nbsp;높은 지적능력과 체력조건, 도덕성과 충성심을 갖춘 이들을 뽑아 배치했다. -물론 전시상황인 만큼 완벽하게 높은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리고 이러한 붉은 군대내의 엘리트조직이라는 특성상 보급이나 장비면에서 여타부대에 앞섰고 봉급도 사병은 일반부대의 2배, 장교는 1.5배가량 받았다. <br><br>이러다보니 근위대창설 초창기때부터 사회주의적이지 못하다는 비난도 많았덴다.<br><br><br>7월16일까지니까 볼사람은 보시길.국내 저작권 없는 핀란드영화니까 태클은 사양<br></p><div class="viewmail-attach"><a class="file_name" href="http://bigmail20.mail.daum.net/Mail-bin/bigfile_down?uid=m3EpyuLPzs3kGSoE3Gogaavag4-Qm8cz" type="daum">Tali-Ihantala.1944.2007.DVDRIP.XviD.AC3-HDK.smi</a> <!--/hanmail/DATA_ROOT/20080709/36/17/34/4619--><!--bigmail20.mail.daum.net--><font size="+0">(71 KB)</font> <a class="file_store" href="http://bigmail20.mail.daum.net/Mail-bin/bigfile_down?uid=m3EpyuLPzs1XqODS6MsHLE1HpoN.ddEZ">PC저장</a> </div><div class="viewmail-attach"><a class="file_name" href="http://bigmail20.mail.daum.net/Mail-bin/bigfile_down?uid=sSjHd-vfmDZ8X-NSYaqPCW396Bjx2zcu" type="daum">Tali-Ihantala.1944.2007.DVDRIP.XviD.AC3-HDK.avi</a> <!--/hanmail/DATA_ROOT/20080709/36/58/45/6473--><!--bigmail20.mail.daum.net--><font size="+0">(1434410 KB)</font> <a class="file_store" href="http://bigmail20.mail.daum.net/Mail-bin/bigfile_down?uid=sSjHd-vfmDZ253BrZGpVSX2BhAt3eWG5">PC저장</a> <br><br></div></div></div><a href="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2.0/kr/" rel="license"><br><img style="BORDER-TOP-WIDTH: 0px; BORDER-LEFT-WIDTH: 0px; BORDER-BOTTOM-WIDTH: 0px; BORDER-RIGHT-WIDTH: 0px" alt="Creative Commons License" src="http://i.creativecommons.org/l/by/2.0/kr/88x31.png"><br></a><br><br>이 <br><font size="+0">저작물</font>은 <br><a href="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2.0/kr/" rel="license">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a>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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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3 Jul 2008 01:58:1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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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 1939년에 이미 독일의 패배를 결정 지은 어떤 이유-오슬로 리포트 ]]>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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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939년, 11월, 노르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