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의 정신?”: 1차세계대전 개전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2) ㄴWW 1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전쟁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개전 당시 프랑스의 교육부 장관 알베르 사로(Albert Sarraut)는 전국 6개도의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전쟁에 대한 여론조사를 지시했다. 그 결과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망연자실이었고, 그다음이 경악이었다. 샤랑트도(都)에서는 57%가량이 부정적인 응답을 보였다.
아쉽게도 독일과 영국에서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몇몇 경험담에 근거해봤을 때, 이들 국가에서도 적지 않은 패닉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해볼수 있다. 동 프로이센 지역에서는 독일군을 보고 러시아군으로 착각해 주민들이 패닉에 빠지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7월 30일 오후 10시에 전쟁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들으며 기상한 뷔템베르크의 병사, 도미닉 라이헤르트는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전쟁? 어디서? 누구를 상대로? 자연스럽게 우리는 곧 아마도 다시 프랑스와 싸우게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다면 선전포고 소식에 환호했던 대중들은 누구일까? 사진속의 그들은 누구일까?
아래는 각각 베를린과 런던에서 개전소식에 환호하는 대중들 사진인데, 두 상이한 국가가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베를린>

<런던>

바로 대중들의 옷차림인데, 대부분이 중산층의 상징인 포크파이 햇이나 더비 햇을 쓰고 있고, 노동자계층의 상징인 플랫 캡을 쓴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니얼 퍼거슨은 시위에 참여한 대중은 대부분 중산층이며, 민족주의적 낭만에 경도된 중산층과 학생들이 징병의 첫 대열에 참가했다고 본다. 즉 원래부터 열광적인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개전으로 인한 패닉은 피할수 없는 전쟁에서 조국방어의지에 대한 헌신으로 대체되어 갔다. 알베르 사로가 실시한 프랑스 여론조사에서도 전쟁에 대한 여론은 부정적-진정-긍정적-열광의 형태로 점차 바뀌어갔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과 러시아, 영국에서도 유사한 상황들이 발생했다. 예상하지 않은, 왜 싸우는지 이유가 납득되지 않은 전쟁에서 대중은 조국이 위협받고 있다는 지도자들의 호소에 응답해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의 당위성에 대한 인지수준의 문제는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관찰되었다. 영국의 경우, 참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런던조약에 따라 보장된 벨기에의 중립을 독일이 침해했고, 잔인하게 벨기에를 유린했기 때문에서 찾았다. 
실제로 8월 4일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트라팔가 광장은 벨기에를 위한 전쟁을 지지하는 대중들로 가득 찼지만, 농촌이나 광촌 지역 지원병들은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하면 다음은 영국을 노릴 것”이기 때문으로 참전 이유를 인식했다. 심지어 일부 기록에선 병사들이 “우리는 벨기에를 무찌르러 간다”라고 노래를 불렀다고 언급된다.

독일에서도 병사들은 자신들이 방어전-조국의 명예, 존엄, 국토등을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인식했다. 빌헬름2세는 개전을 알리는 연설에서 이 전쟁이 독일의 명예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임을 분명히 했다.

전체적으로 교육수준이 낮고, 문맹률이 높은 러시아에서 대중들의 개전 원인에 대한 인식은 보다 심각했다. 개전 첫주에 러시아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은 자신의 병사들이 전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반복해서 참호속에 있는 나의 병사들에게 우리가 왜 전쟁을 하게 됬는지 물었다. 필연적으로 어떤 대공부부가 암살당했고,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모욕하려했다는 의미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질적으로 이들은 세르비아인들이 누구인지 모르며, 마찬가지로 슬라브가 무슨 의미인지도 의심스러워했다. 왜 세르비안들 때문에 우리가 독일과 전쟁을 해야하는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그들은 독일의 야심에 대해서 들어본적 없으며, 그런 나라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마찬가지로, 개전 첫주, 스몰렌스크지역의 비밀경찰은 농촌출신 병사들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기록했다.

“만약 독일인들이 돈을 원하는거면 죽이는것보다 두당 10루블씩 주는게 나을거에요.”

방어의지에 의한 애국주의는 국가의 선전선동에 의해 촉진되었다. 영국에서는 의회모병위원회는 800만장의 징병편지와 5400만장의 포스터를 배포했다. 또한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묘사되었던 것처럼 학교는 모병장소화되었다.

학교뿐만 아니라 회사, 지역공동체, 심지어 여성참정권단체를 비롯한 각종 시민사회는 징병운동에 동참했다. 전쟁전까지만 해도 영국정부를 저주해마지 않던 여성참정권 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독일은 남성 국가이며 독일의 승리는 여성운동에 재앙적인 충격이 될 것”이기에 “징병제를 지지하고, 탄약공장에서의 여성노동을 환영할 것”을 주장했다.

애국주의의 물결에서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웨스트 요크샤이어 탄광주협회는 광부들로 구성된 대대를 모집하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포스터&브레이스웨이트사는 ‘회사는 35세 이하의 모든 미혼 직원들이 즉시 군대에 자원할 것을 기대한다. 또한 기혼에 자격을 갖춘 직원들 역시 같은 길을 택해야’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경제적 유인을 제공한 경우도 있었다. 카디프철도회사는 군대에 자원하는 직원들에게는 고용안정을 보장할 것이며, 부양가족들에게는 수당과 연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공약했다. 반응이 너무 좋아서 취소하긴 했지만.

국가의 열정적인 선전선동과 함께 사라예보사건이 촉발한 경제공황이 지원자들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했다. 사라예보사건은 즉각적인 전쟁을 불러오진 않았지만 각국주식시장의 침체를 불러올 만큼의 충격을 가져왔고, 실업률을 증가시켰다. 실업자들은 군대에서 새 생업을 모색했다.


반전주의자들

사회의 축이 전쟁에 대한 지지로 변해감에도 불구하고 반전평화운동은 계속되었다. 7월 한달동안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반대에 대한 메시지를 유포시켰다. 독일 사민당의 칼 리프크네히트는 7월 13일 만여명의 파리 사회주의자들 앞에서 평화를 위한 노동자들의 단결을 역설했다. 사민당은 7월 30일까지도 프라이부르크 등지에서 반전 시위를 조직했다. 그들은 노동자의 마르세이유(Arbeiter Marseillaise)를 부르며, 전쟁 지지시위대와 충돌했다.



영국에서도 노동당이 반전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8월 2일, 트라팔가광장에서 벌어진 노동당의 반전시위>

노동당은 의회에서 전쟁참전을 두고 논의가 계속되는 동안, 트라팔가 광장에서 대규모반전시위를 조직했다. 8월 2일, 의회연설에서 노동당의 람제이 맥도날드의원은 다음과 같은 연설로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려는 에드워드 그레이의 입장을 비난했다.

"국가의 지도자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 그들 국가의 명예에 호소하지 않은 적이 없다. 우리는 크림에서 국가의 명예 때문에 싸웠다. 우리는 명예 때문에 남아프리카로 달려갔다...만약 외무장관 각하께서 벨기에같은 작은 국가가 위험에 처했다고 말하며, 분쟁을 그곳으로만 국한한다고 보장한다면 우리는 각하를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벨기에에 어떤 지원을 보낼 것인가…당신은 전 유럽적인 전쟁에 나서려 하고 있다."

그러나 두 국가에서 모두 전쟁지지 여론이 우세해지자 사민당과 노동당은 각각 당론을 후퇴했다. 끝까지 반전 입장을 고수한 소수의 계파들만이 각각 독립사민당과 독립노동당을 구성해 반전운동을 계속했다.

반전은 사회주의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독일에서는 1914년 가을, 자유주의적 평화주의자들에 의해서 신 조국연맹(Bund neues Vaterland)가 결성되었다. 
<독일의 신조국연맹회원들, 가운데 알버트 아인슈타인>

영국에서도 노만 엔젤과 버트란드 러셀등에 의해 영국중립위원회, 영국중립연맹, 정전위원회, 징병반대동지회등이 결성했다. 이들은 중립국에서 만나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한 공동의 노력에 대해 논의하고자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유럽국가들간의 대규모전쟁이 문명의 파괴를 불러올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에서는 여전히, 특히 지식인사회에서 막강한 친독·반러감정이 반전여론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의 지식인들 가운데서는 “우리가 배우는 것들은 대부분에서 독일인들에게 왔고”, “독일과 러시아 가운데서 우리와 더 많은 것을 공유하는 쪽이 누구인지는 매우 분명한데” 왜 독일과의 전쟁에 나서려하느냐며 반전의 입장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다. 교사이자 시인이었던 루퍼트 브룩은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겼다.

“나는 독일이 러시아를 조각내버린뒤에 프랑스에게 패배했으면 좋겠다. 대신에 내가 우려하는 것은 독일이 프랑스에게 심각한 타격을 준뒤, 러시아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다...프로이센은 악마다. 그러나 러시아는 유럽과 모든 품위의 종말을 의미한다. 내 생각에 미래는 전 세계를 장악하고 전제적이며, 정신 나간 슬라브제국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전주의자들은 결코 의미있는 다수가 되지 못했다. 반전주의자들은 여론에 휩쓸리고, 국가에 의해 불법화되거나 공개적인 수사의 대상이되면서 목소리를 잃어갔다. 독일의 여성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강력한 대중의 행동이라 보았지만, 그 어떤 반전과 평화의 구호도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상관없이-“조국을 방어해 달라”는 호소보다 강력하진 못했다.




덧글

  • eggry 2016/08/23 11:40 # 답글

    "씁, 어쩔 수 없지."
  • Cicero 2016/08/25 10:55 #

    이미 일어났으니 돌이킬수 없다는 기분으로 전쟁에 동원된게 분명히 존재하죠
  • 천하귀남 2016/08/23 13:14 # 답글

    헌데 개전하고 보니 1m전진하는데 1명씩 죽어나가니...
  • Cicero 2016/08/25 10:57 #

    만약 반전운동이 전쟁의 궤도를 돌렸다면 그런 희생도 없었겠죠
  • 로자노프 2016/08/23 16:01 # 답글

    그러고 보니 반전운동과 그 퇴색, 그리고 그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보여주던 모습 등등... 그 쪽으로도 흥미로운 주제들이 좀 보이던데 말이죠.
  • Cicero 2016/08/25 10:56 #

    1차세계대전자체가 워낙에 풍부한 주제들을 담고있죠
  • 지나가던과객 2016/08/23 21:55 # 삭제 답글

    옛날에 본 이야기 세계사란 책에서 "전쟁터야 말로 휴머니즘을 실천할 수 있는 장소다"라는 말로 전쟁에 긍정적인 분위기를 설명하더군요.
  • ㅈㅁㅋ 2016/09/08 01:01 # 삭제 답글


    바로 대중들의 옷차림인데, 대부분이 중산층의 상징인 포크파이 햇이나 더비 햇을 쓰고 있고, 노동자계층의 상징인 플랫 캡을 쓴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니얼 퍼거슨은 시위에 참여한 대중은 대부분 중산층이며, 민족주의적 낭만에 경도된 중산층과 학생들이 징병의 첫 대열에 참가했다고 본다. 즉 원래부터 열광적인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 이 부분
    요새 일본 우경화를 지지하는 민중이 뚜껑 따보니까 은근히 사회생활 잘하고 부유한 중상류층이 더 많더라
    우리가 아는 프레카리아트 앰ㅊ인생 이런부류가 많은게 아니라. 하류 넷우익들은 그저 주목 많이 받아 퍼센티지가 높아보일 뿐이고
    아베총리를 전폭 지지하고 강한 일본 당당한 일본을 추구하는 그런사람들 집단은 오히려 중산층의 비중이 더 높다

    이런 대목(일본 사정에 대해 좀더 근거가 필요하긴 한데)들과 겹쳐지니까 모골이 송연해지네요
  • ㅈㅁㅋ 2016/09/08 01:03 # 삭제

    하기야 저학력이나 프리터 등등 중하류 청년들이면 징병제나 군수공장 징용제 발동시 제일 많이 착취당할 거라는걸 본능적으로 알만한 계층들인데
    얘네들이 국가권력이 자기들을 강한 일본 만드는데 재료로 소모하고 그 과실은 다른 누군가에게 쥐어준다는 식의 진보적 선전선동에 감화 안되고 있었다는게 더 이상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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