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의 정신?”: 1차세계대전 개전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1) ㄴWW 1


※본 글은 8월 20일 역사콘서트 발표글을 포스팅용으로 재편집한 글입니다.


1차세계대전사를 다룬 책들 가운데 ‘대중은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다룬 책들을 보면 다소 모호한 서술들이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20세기 초 사람들은 “이성과 상식의 시대에 전쟁이란 불가능한 것이라 여겼”으면서도, “평화에 질려있었고,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며 전쟁을 기다렸다”는 서로 상반된 서술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들은 전쟁을 기다리면서도, 전쟁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길 수 있었을까?

물론 이것은 당대인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 경향이 혼재되어있던 까닭이기도 했다. 일례로, 1913년 독일 시인, 알프레드 발터 하이만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평화가 넘쳐날 때 우리는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우리는 용기도, 사명도, 방향도 잃어버리고 
오직 전쟁을 갈망하며 울부짖는다.

반면에 같은 시대를 살았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후의 회고록에서 당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만약 내가 자라났던 1914년 이전의 시대를 간단히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확히 표현하고 싶다. ‘그때는 안보의 황금기였고…누구도 전쟁이나, 혁명, 전복을 믿지 않았다. 이성의 시대에서 모든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것들은 이미 불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어느 시각이 보다 주류에 가까웠을까? 오늘날, 우리가 1차세계대전의 개전을 생각하면 떠올리는 8월 초 선전포고에 환호하는 대중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과, 증언들은 주로 하이만의 시각이 주류였음을 증명하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하이만의 시각이 유럽대중들 사이에 있어서 주류였을까?

전쟁전의 상황: 대중은 군국주의로 향하고 있었는가?

우선 전쟁이전시기 대중들의 인식부터 살펴보자. 전쟁이전부터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전쟁을 기다려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20세기초에 넘쳐났던 전쟁 소설들과 수많은 군국주의적 우익 단체들은 전쟁 가능성에 대한 높은 기대와 인식을 보여준다는 근거로 제시한다.

물론 전쟁에 대한 예측들은 당대에 팽배한 전쟁가능성에 대한 기대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냉전시기를 돌이켜 보자. 톰 클랜시류의 테크노스릴러부터해서 많은 냉전시기 많은 소설들이 미-소 전쟁을 주제로 했지만 그것이 곧 미-소전쟁의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 시기 전쟁에 대한 예측들 가운데서는 전쟁 가능성을 시사하며, 군국주의를 부추기는 소설들도 있었지만, 전쟁의 비참함, 그리고 전쟁이 가져올 결과를 강조해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소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우주전쟁이나 타임머신같은 SF소설작가로 이름 높은 조지 웰즈(H. G. Wells)의 “공중에서의 전쟁(War in the Air)”에서, 비행기술의 발전으로 다가오는 전쟁은 이전 어느 전쟁보다도 처참하며 폐허만을 남길 것임을 경고했다. 

소설은 아니지만 경제학자인 노먼 엔젤(Norman Angell)은 “거대한 환상(Great Illusion)”에서 전쟁은 국가들이 감당하지 못할 경제적 부담을 남길 것을 예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명백하게 군국주의를 부추길 목적이나, 군국주의적 여론에 편승하려는 목적인 소설들도 존재했고, 오히려 이쪽이 더 다수에 가까웠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소설들을 주로 영국과 독일간의 직접적 전쟁을 소재로 했는데, 콜스(R.W. Coles)의 “데스 트랩(Death Trap)”은 영국에 독일군이 상륙하지만 일본의 지원으로 영국은 가까스로 독일을 격퇴한다는 내용이었다. 사키(Saki)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먼로도 “윌리엄이 왔을 때(When William Came)”라는 제목으로 영국과 독일간의 전쟁을 소재로한 소설을 집필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해외식민지로 떠나있는 동안에 독일이 영국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독일의 지배체제에 굴종하는 친지들을 버리고, 인도에 있는 영국 망명정부로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런 소설들은 주로 대부분 정책 프로파간다의 수단이었으며 니얼 퍼거슨이 추악한 동맹이라 이름붙힌 언론사-작가-정치가간 협력의 결과물이었다. 언론사는 흥미돋는 전쟁소설을 통해 신문구독률을 높이고, 작가는 돈을 벌며, 정치인들은 방위정책에 유리한 지지여론을 확보하는 구조였다.

협력의 대표적인 예로 들수 있는 것이 윌리엄 레케(William Le Quex)의 “1910년의 침략(The Invasion of 1910)이었다. 


독일이 채널해협을 건너 영국을 침공한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노골적으로 프레데릭 로버츠(Frederick Roberts)원수의 징병제법안에 대한 지지를 담고 있었다. 로버츠 원수는 잠재적인 대륙의 적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는 영국해군이 동원될 수 없는 순간에 침략을 감행하면, 막을 수 없다며 70만 가량의 육군을 편성하는 징병제 법안을 제안했으나 거부되었다.


성공적인 전쟁소설작가였던 레케는 로버츠의 주장을 소설화하기 위해 고용되어 소설을 집필했다. 그의 소설은 토리 성향이 강한 데일리 메일을 통해 연재되어, 출판되었다. 레케는 소설속에서 노골적으로 “징병법안이 통과되었다면 이런 비극은 막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가 10년전인 1894년에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협공으로 궁지에 몰린 영국을, 독일이 구원한다는 내용의 소설인 “영국의 대전쟁(The Great War in England)”을 집필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후에도 레케는 대륙의 가상 적국(독일)이 영국을 침공하는 소설들을 연이어 집필했는데, 레케의 소설을 비롯한 독일을 가상적국으로 삼은 소설들은 대부분 독일 이민자들이 잠재적 스파이, 위장한 침략군으로 설정했다. 그 결과는 영국 대중들 사이에 전파된 광증에 가까운 독일 스파이에 대한 공포였다. 


그러나 그것이 반독일 감정으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많은 독일인들이 영국에 거주 및 이민해왔고, 이 시기 옥스퍼드 학생의 28%가 독일인 유학생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독일 해군 장관 틸피츠의 딸도 있었다.

그렇다면 레케의 소설은 레케와 로버츠가 의도했던 것처럼 전쟁에 대한 위기감을 고조시켜 영국 국민들의 호전성을 증가시켰을까? 이 역시 꼭 그렇지는 않다.

징병법안에 대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전쟁과 군비에 회의적인 자유당의 승리로 끝났다. 게다가 수많은 군사우익단체, 준군사조직의 존재들도 전쟁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대부분 처참한 수준의 참여율과 조직률을 보였다.
징병제 법안을 지지하던 전국복무연맹의 회원수는 1912년 기준으로, 98,931명, 지지자는 218,513명이었고, 민병대인 자원병군단은 1907년 기준으로 335,849명으로 이는 15-49세 사이의 성인 남성인구의 2.7%를 밑돌았다.

그렇다면 독일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도 영국과 거의 대칭적인 현상이 발생했다. 전쟁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소설들이 출판되었는데, 칼 아이젠하르트(Karl Eisenhart)의 “잉글랜드에 대한 심판(Die Abrechnung mit England)”독일의 신병기인 전기동력전함이 영국해군을 패퇴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작가인 아우구스트 니만(August Niemann)은 독일, 프랑스, 러시아가 힘을 합쳐 영국을 공격한다는 “세계대전: 독일의 꿈(Der Weltkrieg deutsche Traume)”을 집필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출판된 소설들에서도 잠재적 적국(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대한 위협과 경계심을 부추기는 소설들도 있었지만, 전쟁이 가져올 비참한 결과에 대한 경고를 담은 소설들 역시 출판됬다.

페르디난트 그라우토프(Ferdinand Grautoff)는 “구 세계의 몰락(der Zusammenbruch der alten Welt)”에서 사모아와 같은 식민지 문제로 영국과 독일의 충돌이 전면적인 유럽전쟁으로 확대. 전쟁은 양측에게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게 하고, 세계의 패권은 미국과 러시아에게 넘어갈것으로 예상했다.  

칼 블라이프트로이(Karl Bleibtreu)의 “영국에 대한 공격적 침략(Die 'Offensiv-Invasion' gegen England)”에서는 영국과 독일의 해군력 충돌은 유럽대륙의 우위와 대영제국에 종말을 가져와 다른 모든 대륙-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라 보았다.

물론 다른 점이 있다면 독일의 경우, 우익 및 군국주의 단체의 규모가 영국에 비해서 큰 규모였다는 것을 꼽을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대규모였던 해군연맹의 경우 100만의 회원수를 자랑했다. 그러나 쿳지(M. S. Coetzee)는 이런 숫자는 유령회원이나 연계단체의 회원까지 포함한 숫자일뿐 실제로는 군국주의적 단체들은 다합쳐도 55만명 수준이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연계단체들을 보면 이들 군국주의단체 연맹들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독일육군연맹 남서부 지부 가맹단체에는 중독성음료의 남용에 반대하는 독일연맹, 여성해방을 위해 싸우는 독일연맹, 반사회민주당연맹, 범독일어협회, 엽견의 혈통과 족보를 위한 뷔템베르크협회 등등이 포함되어있다.


게다가 위와 같은 단체의 설립에는 독일이 영국과 달리 민주화가 진행중에 있는 국가라는 특징으로 봐야할 부분들이 존재한다. 잭 스나이더는 군국주의적 시민단체 가운데 특히 해군연맹은 육군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철과 밀의 동맹”이라 불리는 보수파에 대항하기 위해 자유주의적 상업 자본가-중산층이 지지한 조직으로, 중산층 민족자유주의자들이 그들의 정치적 파트너로 해군을 택한 것으로 볼수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선거에서도 독일은 영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화주의, 반전주의 지향적인 사민당이 1당 지위를 차지한 반면, 확장주의적인 민족자유당은 사민당의 절반수준(17%)을 득표했다.

이런 대중들의 전쟁에 대한 낮은 인식과 지지율로 인해 전쟁을 원하던 자들, 혹은 정책 당국자들도 전쟁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군부, 특히 독일 군부내에서는 19세기에서 시작된 장기 평화가 자기들의 조직기반을 위협할 것이라는 인식이 존재했지만 이들조차 “전쟁이 나면 좋겠지만 나겠냐?”는 시각에 가까웠다.

대표적으로 프로이센 국방장관이자 독일제국 참모총장이던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그런 입장이었다.

“대규모 유럽전쟁이 발생하면 일본과 미국이 이득을 볼 것이다... 인간의 계산을 따른다면 전쟁이란 생각할수 없다...(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전쟁은 반가운 일이다. 나는 지루한 평시의 삶에 지쳤고, 매우 지겹기 때문이다.”


틸피츠의 부관인 알베르트 호프만 중령은 1912년 12월 9일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는 전쟁의 불가피성을 믿지 않는다. 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런던 금융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고, 다른 국가의 은행가들도 모두 그렇게 할 것이다.”

1912년 10월 오스트리아의 강경파 정치인 요제프 레들리히도 비슷한 기록을 남긴다.

“일반 대중들은 강대국들간의 전쟁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사라예보 사건이 대중의 인식을 바꾸었을까?

하지만 전쟁에 대한 대중의 낮은 지지율과 인식은 사라예보사건을 거치면서 변화되었을 거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변화되었을까? 물론 암살사건이 있은 직후, 오스트리아에서는 반 세르비아 폭동이 벌어지고, 세르비아에서는 암살을 환영하는 시위가 벌어졌지만, 어디까지 국지적이었다. 

사라예보사건에도 불구하고 전쟁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은 각 국가의 고위정치가들과 군인들은 여름휴가를 즐기러 떠났다. 영국 외무장관인 에드워드 그레이는 오스트리아가 독일없이는 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고, 독일은 지금같은 데땅뜨시기에 전쟁을 하려하진 않을 것이기에, 안심할수 있다고 믿고, 여름휴가를 떠났다. 실제로 빌헬름2세도 북해로 크루즈를 떠났고, 몰트케도 온천 휴양지인 칼스바드로 휴양을 떠났다.-물론 독일과 오스트리아 고관들의 휴가에 대해서는 전쟁의도를 숨기기 위한 기만책이었다는 평가가 있지만. 심지어 세르비아 참모총장 라도미르 푸트니크는 잠재적 적국인 오스트리아의 온천 도시 바트글라이헨베르크로 휴양을 떠났고, 나중에 그곳에서 선전포고 소식을 접했다. 그는 1차세계대전 최초의 포로이자, 포로석방의 대상이 되었다.

고위정치인들이 휴가를 떠남에 따라 대중들 역시 전쟁의 가능성을 높이 보지 않고 여름 휴가철에 돌입했다. 게다가 휴가외에도 다른 현안들이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국은 자유당의 선거공약중 하나였던 아일랜드 자치 문제를 두고서 국론이 분열된 상태였다. 프랑스는 앙리에트 카요 사건이 대중의 화제가 되었다. 재무장관 조제프 카요가 공개적으로는 지지하는 증세법안을 사적으로는 비난하고 있다는 개인편지를 르 피가로가 폭로하자, 그의 부인인 앙리에트 카요가 남편의 명예와 사랑을 위해-재혼이었던 앙리에트 카요는 피가로지가 결혼이전 자신과 남편이 주고받은 편지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피가로지 편집장인 가스통 칼메트를 권총으로 쏴 죽인 이 사건은 유럽의 한구석에서 벌어진 다른 암살사건보다 더 프랑스인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카요 부인은 ‘여성은 남성에 비해 온전한 판단을 내릴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로 판결받았다. 


한편, 동중부유럽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세르비아같은 농업국가들은 농번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세르비아는 총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평소 언행이 거칠고 직설적이었던 황태자의 죽음이 되려 전쟁의 가능성을 줄여줄것이라는 여론조차 존재했다. 심리학자였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자신의 환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페르디난트가 살아서 옥좌에 올랐다면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할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1914년 7월 24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전달했을 때조차, 대중들은 유럽국가들간 전면전쟁의 가능성을 높게 생각하지 않았다. 베른하르트 로젠베르거의 연구에 따르면 7월의 마지막주에 독일언론의 65%가량이 전쟁이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대부분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간의 제한전쟁의 가능성이었다.

대부분의 유럽대중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조차 7월 30일이 지나도록 전쟁, 특히나 유럽전체를 아우르는 전쟁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의 아벨 페리 차관은 7월 29일 일기에 러시아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푸앙카레 대통령과 비비안니 총리의 당시 정세인식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푸앙카레 대통령과 비비아니총리)는 덩케르크에 도착했을 때, 전쟁이 일어날 거라 믿고 싶지 않아했다. 그들은 모로코에서 군부대를 본토로 돌리도록 한 나의 결정이 과잉반응이라 생각했다.”
푸앙카레가 알자스 로렌의 회복을 주요정치적 의제로 내걸었던 인물이었던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반응일것이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지도자였던 장 조레스는 그가 암살당하기 이틀전인 1914년 7월 30일 당시 정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번도 아가디르(2차모로코위기)와 유사할 것이다. 기복이 있겠지만 알아서 잘 정돈될 것이다.”

덧글

  • 까마귀옹 2016/08/22 09:13 # 답글

    '전쟁이 일어날 것인가,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와 '전쟁이 일어나면 좋을까, 좋지 않을까?'가 혼재된 상태이군요.
  • Cicero 2016/08/25 10:57 #

    예 이전의 서술처럼 전쟁이 일어나길 고대했다는건 일부적인 시각에 불과했죠
  • santalinus 2016/08/22 13:17 # 답글

    다들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라고 낙관했었죠. 그것도 자국의 승리로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a
  • Cicero 2016/08/25 10:57 #

    실제로는 모두가 지는 전쟁이었지만요
  • 2016/08/22 18:34 # 삭제 답글

    낙관과 불안, 우발과 계획, 그리고 호전과 반전이 혼재되어 있었지만 그 결과는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다는게 아이러니합니다.

    비록 그때와는 다르겠지만 현재의 동북아의 상황과 어느 정도 유사성이 보이기에 좀 더 섬뜩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근처에 살아서 요번 역사 콘서트에 참석해보고 싶었지만 일이 있어서 참가하지 못해 꽤 아쉽네요. 정말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 Cicero 2016/08/25 10:58 #

    다음에라도 기회가 되시면 한번 뵜으면 좋겠군요^^
  • 쾅독수리 2016/08/22 18:52 # 답글

    주전론과 상반된 여론, 예상도 많이 빗발쳤지만 결국 세계대전을 피할수는 없었죠. 이럴수록 다가오는 말이 '네가 전쟁에 관심이 없더라도 전쟁은 네게 관심이 있다'...
  • Cicero 2016/08/25 10:59 #

    사실 그 피하지 못한 과정도 보면 휘말려들어갔다고 설명될만하죠.
  • Fedaykin 2016/08/23 11:46 # 답글

    여담이지만 영국 소설과 독일 소설의 제목의 차이가 나는게 재밌네요.
  • Cicero 2016/08/25 11:00 #

    영국의 경우는 자신들이 침략당할것이라본 반면,독일의 경우는 자기들이 처들어가게 될 것이라 분 경향이 강하죠.
  • unik519 2018/08/26 10:51 # 삭제 답글

    매우 좋은 글을 이제야 읽고 댓글 남깁니다.
    1차 대전 대중 분위기를 포스팅하셨을 때 어느 참고 서적을 여쭤볼 수 있을까요? 최근 흥미를 갖게 된 부분이라서요.
    특히 포스팅 1편에선 각국 정치인과 군부의 전쟁가능성 예견 부분과 포스팅2편에선 영국과 독일에서 출신 계층별로 나뉘는 전쟁찬반과 그 이유를 자세히 다룬 책들을 말이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 Cicero 2018/08/26 13:16 #

    니얼 퍼거슨의 The Pity of War와 An Improbable War?: The Outbreak of World War I and European Political Culture before 1914 를 참고했습니다.
  • unik519 2018/08/26 21:15 # 삭제

    답변 정말 감사합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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