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그 반작용도 적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영웅적이며 강철심장을 지닌" 하이드리히를 애도하고 예찬했던 히틀러 였지만, 사석에서는 그가 방탄설비를 갖추지 않은 오픈카를 타고 이동하다가 암살당한것을 두고, 멍청한 짓이라고 폄하하며, 점령지역의 고위관료들에 대한 경비수준을 상향시키도록 명령했죠,
게다가 하이드리히 암살에 대해 나치가 취한 보복들은 체코슬로바키아내 저항운동에 치명타를 가져왔습니다. 리디체 에서는 200명의 성인 남성이 학살당하고, 여자와 어린아이는 집단수용소로 보내졌으며, 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졌죠. 레자키에서는 SOE의 라디오장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50명의 마을주민이 학살되고, 마찬가지로 마을전체가 파괴되었습니다. 암살이후, 여름까지 지속된 독일의 보복행위로 1,500명가량의 민족주의자들, 전직장교., 지식인, 공산주의자등 저항조직원들이 살해당핬고, 3천명의 체코 유대인들이 테레지엔슈타트의 절멸수용소에 수감되었죠. 베를린에서는 크리스탈나흐트때처럼, "분노한 독일인들의 자연스러운 봉기"로 150명가량의 유대인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이 소름 끼치는 독일의 대응은 연합국들로 하여금, 나치 고위관료들을 암살하는것에 대해 주저하게 만들었죠. 본래 에드발트 베네스(Edvard Beneš), 체코 망명정부 대통령은 하이드리히 이후에도 나치점령정부에서 교육및 국민계몽 장관을 맡고 있는 전직 체코군 장교 엠마누엘 모라벡(Emanuel Moravec)과 하이드리히의 후임자, 칼 헤르만 프랑크(Karl Hermann Frank)를 암살할 생각이었지만, 하이드리히 암살로 촉발된 독일의 보복으로 인해, 더이상의 암살은 감히 기도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독일 점령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유럽내 저항조직들이 SOE의 공작활동에 비협조적이게 만들었죠.

<左-칼 한스 프랑크, 右-엠마뉴엘 모라벡, 두사람 모두 당장은 죽음은 피했지만 종전이후 처형되거나 자살하고 말죠.>
SOE는 이 상황을 돌파해보고자,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였죠. 대표적으로 하이드리히같은 고위직이 아닌, 지방경찰이나, 일선 장교들같은 하위관료들을 타겟으로 하는 암살을 지속하도록, 지령을 내리고, 1943년 여름에는 전 유럽의 독일 점령지에서 Ratweek작전을 통해 동시다발적인 점령군과 협조자들에 대한 암살을 시행하고자 했지만, 저항조직들은 리디체의 악몽에서 벗어날수 없었습니다. 덴마크,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등 서유럽 지역에서는 아주 약간의 호응만이 있었을 뿐이었죠.


그나마 프랑스지역에서는 작전에 대한 호응이 좋았습니다. 사보타지에 특화된 저항조직인 아르마다(Armada)의 성과가 두드러졌는데, 이 조직의 전설적인 저항운동원인 Khodia는 리옹에서 1944년 봄 동안 11명의 친위대 보안대원들을 제거했죠. 프랑스 이외에도 렛위크 작전이 성과를 거둔 곳은 이미 독일군에게는 헬게이트가 열린 유고슬라비아나 폴란드가 있었죠.-체트닉이 연합군, 특히 영국의 SOE와 사이가 틀어진 원인중에서는 체트닉이 추축군의 대규모 민간에 대한 보복을 우려해 렛위크작전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반면, 티토의 파르티잔은 자체 보유중인 공군까지 동원해 이 작전에 참여한게 대비되었다는 주장도 았습니다.

<뭐 대략 번역하면 '쥐잡는 주' 정도?>

그나마 프랑스지역에서는 작전에 대한 호응이 좋았습니다. 사보타지에 특화된 저항조직인 아르마다(Armada)의 성과가 두드러졌는데, 이 조직의 전설적인 저항운동원인 Khodia는 리옹에서 1944년 봄 동안 11명의 친위대 보안대원들을 제거했죠. 프랑스 이외에도 렛위크 작전이 성과를 거둔 곳은 이미 독일군에게는 헬게이트가 열린 유고슬라비아나 폴란드가 있었죠.-체트닉이 연합군, 특히 영국의 SOE와 사이가 틀어진 원인중에서는 체트닉이 추축군의 대규모 민간에 대한 보복을 우려해 렛위크작전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반면, 티토의 파르티잔은 자체 보유중인 공군까지 동원해 이 작전에 참여한게 대비되었다는 주장도 았습니다.
렛위크작전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SOE의 고민은 계속되죠. 대규모 보복이 우려되는 상황하에서 무슨 수로 추축국 요인들에 대한 공작을 벌이는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도중, SOE내에서 한가지 기발한 아이디어가 제기됩니다.
"암살이 안되면 납치하면 되잖아요."

SOE는 이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곧 실천에 옮깁니다. 1944년 1월, SOE는 지역내 레지스탕스조직과 민간인을 학살한것으로 악명높은 독일 제 22 공수사단장, 프리드리히 빌헬름 뮐러(Friedrich-Wilhelm Müller)를 납치해 카이로의 특별군사법정에 세울 계획을 세우죠. 그러나, 이 계획은 뜻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아직 작전이 준비중인 1944년 3월 1일, 사단장이 빌헬름 뮐러에서 하인리히 크라이페(Heinrich Kreipe)로 교체되고 만것이죠. 이를두고 SOE는 작전을 계속해야 할지, 아니면 포기하고 다른 타겟을 노릴지 고민하긴 했지만, 그냥 아쉬운데로 크라이페를 납치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SOE소속, 패트릭 레이 퍼머(Patrick Leigh Fermor)소령과 윌리엄 스탠리 모스(Captain William Stanley Moss)대위는 크레타 출신 SOE대원들과 지역 레지스탕스조직의 협조를 얻어, 검문중인 독일군 헌병으로 위장해, 차를 타고 이동중이던 크라이페를 납치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있을 독일군의 보복에 대비해, 차내에 메모를 남기죠.


"당신네 사단장은 방금 전 영국군에게 납치되었다... 이걸 읽을즈음이면 우리는 이미 카이로에 있을것이다. 단언컨데, 이 작전은 크레타 주민이나 파르티잔의 협조없이 진행되었으며...이 때문에 지역주민들에게 어떤 조치가 취해진다면 그것은 부당하며 부적절한 짓이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뮐러, 납치는 피했지만 종전후 그리스에서 열린 종전재판으로 끝내 사형에 처해졌죠.>

<하인리히 크라이페 소장,
납치된 이후, 산위에서 아침을 맞으며, 퍼머와 함께 라틴어로 시를 읊기도한 나름 호인이었습니다>
납치된 이후, 산위에서 아침을 맞으며, 퍼머와 함께 라틴어로 시를 읊기도한 나름 호인이었습니다>

<크라이페 납치에 나선 SOE팀. 가운데 독일군복입은 사람들이 퍼머와 모스입니다.>
납치된 크라이페는 퍼머 소령과 영국으로 비교적 후한대접을 받았죠. 덕분에 크라이페는 자신을 납치한 퍼머에게 까칠하게 굴지 않았고, 종전이후인 1970년에 크라이페는 퍼머와 함께 그리스의 TV쇼에 출현하기까지 했습니다.
SOE가 암살을 대체하기위해 선택한 납치는 여러모로 '암살'이상으로 실용성있었죠. 우선 요인이 생존해 있는 상태다보니, 역 보복의 가능성때문에 독일점령당국은 지역저항조직에 대해 보복조치를 취하는데 지장이 있었고, 더군다나 납치 이후 심문을 통해 적정보를 캐낼수있다는것도 이점이었습니다.
SOE는 종전시기까지 추축국 요인들에 대한 납치공작을 벌였고, 거물급 요인들에 대한 납치도 기획했죠. 납치대상 선상에 올랐던 인물중에는 당시 서부전선에 있던 에르빈 롬멜도 포함되어 있었죠. SOE는 7월 중순 경, 프랑스출신 요원인 레이몽 쿠로(Raymond Couraud)가 이끄는 한개 팀을 파견해 롬멜을 납치할 생각이었습니다만, 7월 17일 롬멜이 영국군의 공습으로 중상을 입고, 이후 요양 도중, 7.20사건으로 강요된 자살을 통해 생을 마감함으로써 SOE의 롬멜 납치 계획은 폐기됩니다.


<롬멜이 이때 SOE에게 납치되어 종전을 맞이했다면 그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됬을지 나름 궁금하기도 합니다.>
참조: Roger moorhouse 저, Killing hitler
데이비드 베레비 저,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Wikipedia-Heinrich Kreipe
ISLAND FARMSPECIAL CAMP공식홈페이지
덧글
유럽의 제공권을 빼앗겼다.
일전에 관련해서 포스팅한적이 있습죠.
http://flager8.egloos.com/2524476
"너님은 그거 이겼어도 이긴게아님."
이러고 놀았을듯 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