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드리히 암살이후 ㄴWW 2

1942년 5월 27일, 영국SOE로부터 훈련받은 두명의 체코슬로바키아인들에 의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보호관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암살됩니다. 공식적인면에서 본다면 하이드리히 암살작전인, 안트로포이드(Anthropoid)작전은 꽤나 성공적이었죠. 목표인 하이드리히는 암살하는데 성공했고, 하이드리히에 의해 주도되었던 SD의 업무에 일부 장애를 가져왔고, 독일지도부에게 적잖은 충격을 던져주었으니까요. -히믈러는 마치 자신의 아들이 죽은것처럼 오열했으며,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데체할수 없는" 인물이 죽었다고 기록했죠. 히틀러 역시 공식적으로 "강철의 심장"을 가진 이의 죽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결과로 베네스 대통령의 체코 망명정부는 다른 강대국 수준의 연합국들로부터 그 지위를 인정받을수 있었죠. 

하지만 그 반작용도 적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영웅적이며 강철심장을 지닌" 하이드리히를 애도하고 예찬했던 히틀러 였지만, 사석에서는 그가 방탄설비를 갖추지 않은 오픈카를 타고 이동하다가 암살당한것을 두고, 멍청한 짓이라고 폄하하며, 점령지역의 고위관료들에 대한 경비수준을 상향시키도록 명령했죠,


게다가 하이드리히 암살에 대해 나치가 취한 보복들은 체코슬로바키아내 저항운동에 치명타를 가져왔습니다. 리디체 에서는 200명의 성인 남성이 학살당하고, 여자와 어린아이는 집단수용소로 보내졌으며, 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졌죠. 레자키에서는 SOE의 라디오장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50명의 마을주민이 학살되고, 마찬가지로 마을전체가 파괴되었습니다. 암살이후, 여름까지 지속된 독일의 보복행위로 1,500명가량의 민족주의자들, 전직장교., 지식인, 공산주의자등 저항조직원들이 살해당핬고, 3천명의 체코 유대인들이 테레지엔슈타트의 절멸수용소에 수감되었죠. 베를린에서는 크리스탈나흐트때처럼, "분노한 독일인들의 자연스러운 봉기"로 150명가량의 유대인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이 소름 끼치는 독일의 대응은 연합국들로 하여금, 나치 고위관료들을 암살하는것에 대해 주저하게 만들었죠. 본래 에드발트 베네스(Edvard Beneš), 체코 망명정부 대통령은 하이드리히 이후에도 나치점령정부에서 교육및 국민계몽 장관을 맡고 있는 전직 체코군 장교 엠마누엘 모라벡(Emanuel Moravec)과 하이드리히의 후임자, 칼 헤르만 프랑크(Karl Hermann Frank)를 암살할 생각이었지만, 하이드리히 암살로 촉발된 독일의 보복으로 인해, 더이상의 암살은 감히 기도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독일 점령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유럽내 저항조직들이 SOE의 공작활동에 비협조적이게 만들었죠.


<左-칼 한스 프랑크, 右-엠마뉴엘 모라벡, 두사람 모두 당장은 죽음은 피했지만 종전이후 처형되거나 자살하고 말죠.>


SOE는 이 상황을 돌파해보고자,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였죠. 대표적으로 하이드리히같은 고위직이 아닌, 지방경찰이나, 일선 장교들같은 하위관료들을 타겟으로 하는 암살을 지속하도록, 지령을 내리고, 1943년 여름에는 전 유럽의 독일 점령지에서 Ratweek작전을 통해 동시다발적인 점령군과 협조자들에 대한 암살을 시행하고자 했지만, 저항조직들은 리디체의 악몽에서 벗어날수 없었습니다. 덴마크,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등 서유럽 지역에서는 아주 약간의 호응만이 있었을 뿐이었죠.


<뭐 대략 번역하면 '쥐잡는 주' 정도?>


<1945년 네덜란드에서는 치안 책임자인 한스 에르빈 로우터가 저항조직의 습격을 받는데 
이는 의도되었다기보단 철저한 우연의 결과였죠.>


그나마 프랑스지역에서는 작전에 대한 호응이 좋았습니다. 사보타지에 특화된 저항조직인 아르마다(Armada)의 성과가 두드러졌는데, 이 조직의 전설적인 저항운동원인 Khodia는 리옹에서 1944년 봄 동안 11명의 친위대 보안대원들을 제거했죠. 프랑스 이외에도 렛위크 작전이 성과를 거둔 곳은 이미 독일군에게는 헬게이트가 열린 유고슬라비아나 폴란드가 있었죠.-체트닉이 연합군, 특히 영국의 SOE와 사이가 틀어진 원인중에서는 체트닉이  추축군의 대규모 민간에 대한 보복을 우려해 렛위크작전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반면, 티토의 파르티잔은 자체 보유중인 공군까지 동원해 이 작전에 참여한게 대비되었다는 주장도 았습니다.


렛위크작전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SOE의 고민은 계속되죠. 대규모 보복이 우려되는 상황하에서 무슨 수로 추축국 요인들에 대한 공작을 벌이는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도중, SOE내에서 한가지 기발한 아이디어가 제기됩니다.


"암살이 안되면 납치하면 되잖아요."




SOE는 이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곧 실천에 옮깁니다. 1944년 1월, SOE는 지역내 레지스탕스조직과 민간인을 학살한것으로 악명높은 독일 제 22 공수사단장, 프리드리히 빌헬름 뮐러(Friedrich-Wilhelm Müller)를 납치해 카이로의 특별군사법정에 세울 계획을 세우죠. 그러나, 이 계획은 뜻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아직 작전이 준비중인 1944년 3월 1일, 사단장이 빌헬름 뮐러에서 하인리히 크라이페(Heinrich Kreipe)로 교체되고 만것이죠. 이를두고 SOE는 작전을 계속해야 할지, 아니면 포기하고 다른 타겟을 노릴지 고민하긴 했지만, 그냥 아쉬운데로 크라이페를 납치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따라, SOE소속, 패트릭 레이 퍼머(Patrick Leigh Fermor)소령과 윌리엄 스탠리 모스(Captain William Stanley Moss)대위는 크레타 출신 SOE대원들과 지역 레지스탕스조직의 협조를 얻어, 검문중인 독일군 헌병으로 위장해, 차를 타고 이동중이던 크라이페를 납치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있을 독일군의 보복에 대비해, 차내에 메모를 남기죠.

"당신네 사단장은 방금 전 영국군에게 납치되었다... 이걸 읽을즈음이면 우리는 이미 카이로에 있을것이다. 단언컨데, 이 작전은 크레타 주민이나 파르티잔의 협조없이 진행되었으며...이 때문에 지역주민들에게 어떤 조치가 취해진다면 그것은 부당하며 부적절한 짓이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뮐러, 납치는 피했지만 종전후 그리스에서 열린 종전재판으로 끝내 사형에 처해졌죠.>



<하인리히 크라이페 소장,
납치된 이후, 산위에서 아침을 맞으며, 퍼머와 함께 라틴어로 시를 읊기도한 나름 호인이었습니다>


<크라이페 납치에 나선 SOE팀. 가운데 독일군복입은 사람들이 퍼머와 모스입니다.>

 
납치된 크라이페는 퍼머 소령과 영국으로 비교적 후한대접을 받았죠. 덕분에 크라이페는 자신을 납치한 퍼머에게 까칠하게 굴지 않았고, 종전이후인 1970년에 크라이페는 퍼머와 함께 그리스의 TV쇼에 출현하기까지 했습니다.  

SOE가 암살을 대체하기위해 선택한 납치는 여러모로 '암살'이상으로 실용성있었죠. 우선 요인이 생존해 있는 상태다보니, 역 보복의 가능성때문에 독일점령당국은 지역저항조직에 대해 보복조치를 취하는데 지장이 있었고, 더군다나 납치 이후 심문을 통해 적정보를 캐낼수있다는것도 이점이었습니다.


SOE는 종전시기까지 추축국 요인들에 대한 납치공작을 벌였고, 거물급 요인들에 대한 납치도 기획했죠. 납치대상 선상에 올랐던 인물중에는 당시 서부전선에 있던 에르빈 롬멜도 포함되어 있었죠. SOE는 7월 중순 경, 프랑스출신 요원인 레이몽 쿠로(Raymond Couraud)가 이끄는 한개 팀을 파견해 롬멜을 납치할 생각이었습니다만, 7월 17일 롬멜이 영국군의 공습으로 중상을 입고, 이후 요양 도중, 7.20사건으로 강요된 자살을 통해 생을 마감함으로써 SOE의 롬멜 납치 계획은 폐기됩니다. 


<롬멜이 이때 SOE에게 납치되어 종전을 맞이했다면 그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됬을지 나름 궁금하기도 합니다.>


참조: Roger moorhouse 저, Killing hitler
        데이비드 베레비 저,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Wikipedia-Heinrich Kreipe
       ISLAND FARMSPECIAL CAMP공식홈페이지

덧글

  • ArchDuke 2011/04/04 20:57 # 답글

    그냥 만슈 구델옹과함께 자서전 트리오가 되셨겠죠
  • Cicero 2011/04/05 01:49 #

    범람하는 롬멜 평전을 생각하면 차라리 자서전 한권있는게 낮지 않았을까 합니다.
  • 행인1 2011/04/04 21:24 # 답글

    SOE에 끌려가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종전을 맞이하여 자서전 쓰고 TV에 출연하는 롬멜을 상상해보니...orz
  • Cicero 2011/04/05 01:50 #

    종전후 TV에서 현대전에 대해 코멘트다는 롬멜...
  • 지나가던 이 2011/04/05 21:44 # 삭제

    차라리 지금상태가 훨 낫네요~~~ ㅋㅋ
  • 만슈타인 2011/04/04 21:39 # 답글

    롬멜인 납치되었으면 참 볼만 했을 겁니다.
  • Cicero 2011/04/05 01:50 #

    몬티랑 패튼이랑 같이해서 종전후 기념사진박았을지도요?
  • 누군가의친구 2011/04/04 21:52 # 답글

    롬멜이 납치되었으면 독일 국방군에게 입힐 외적 타격효과가 컸을 겁니다. 만약 납치후 히틀러에게 대대적 반기를 들고 영국 BBC 선전방송에 나왔다면 참 볼만 했겠죠.
  • Cicero 2011/04/05 01:51 #

    파울루스보다는 몇배는 더 압박이 되었겠죠.
  • 정호찬 2011/04/04 23:52 # 답글

    If, 괴링을 납치했다.

    유럽의 제공권을 빼앗겼다.
  • Cicero 2011/04/05 01:51 #

    역시 괴링이랑 리벤트로프는 그자리에 있는게 연합군을 위한 일...
  • ArchDuke 2011/04/05 03:57 #

    크허허허허
  • Real 2011/04/05 01:02 # 답글

    의외로 히틀러 측근들의 납치나 암살은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 신기하네요;; 연합국 입장에서는 머리부터 작살내는 것도 중요하게 봤을것 같은데 말이죠. 예를 들면 괴벨스라든지 히믈러라든지 말이죠.
  • Cicero 2011/04/05 01:55 #

    이런 요인들 납치나 제거에는 현제 저항조직과의 연계가 필수적인데, 나치의 이너서클에 접촉할만한 저항조직 끈을 연합군이 확보할수가 없으니 말이죠. 이후에도 포스팅하겠지만, 나치정권 핵심부에 대한 사보타지를 벌일만한 스파이망을 구성한 연합국은 잘해야 소련정도였습니다. 뭐, 실제로 종전이 가까워오던 44년 45년쯤 되면 히틀러 암살계획의 확장으로 괴벨스나 히믈러 제거를 기획하긴 합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1/04/05 06:50 #

    저격수를 통한 히틀러 암살은 연합군 계획에 있었습니다만 히틀러를 그냥 놔두는게 나치 몰락을 가속화 시킬거라는 판단때문에 그만둔바 있지요.ㅋ
  • Cicero 2011/04/05 09:33 #

    누군가의친구/
    일전에 관련해서 포스팅한적이 있습죠.

    http://flager8.egloos.com/2524476
  • 드래곤워커 2011/04/05 01:50 # 답글

    롬멜 납치되었으면 어떻게 될 지 흥미롭네요..
  • .......... 2011/04/05 12:31 # 삭제 답글

    롬멜이 납치되었다면.....일단 내복 상표 영감님이랑 아웅다웅부터 하실듯.....
  • Cicero 2011/04/06 10:29 #

    "내가 너님이겼음."

    "너님은 그거 이겼어도 이긴게아님."

    이러고 놀았을듯 하군요.
  • M-5 2011/04/05 17:55 # 답글

    일단 죽이면 성공인 암살도 아니고 적점령지 한가운데에서 적국 장군을 붙잡아 올 수 있었다니... 현실에서도 영화같은 첩보작전이 가능하긴 하군요 ㄷㄷㄷ
  • Cicero 2011/04/06 10:30 #

    현지 게릴라조직이 잘갖춰져서 가능한 일이었죠.
  • 2011/04/23 01:28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32523 2021/05/08 15:34 # 삭제 답글

    당연한 보복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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