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11월 혁명(3)-노동자와 병사들의 붉은 기 ㄴ독일혁명사

제 3함대의 제독 휴고 크라프트는 수병들에게 휴양기간을 주면 함대내 수병들의 격양된 분위기가 잦아들것이라고 판단하고 킬로 귀항했지만, 상황은 제독이 의도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함대내 수병들은 모항으로 돌아온뒤, 군항에 남아있던 자신들의 동료들에게 '제독들의 반란'을 항명으로 막아낸 전우들이 무슨 짓을 당했는가를 전파했고, 곧 킬에 주둔한 총 4만명의 병사들사이에서는 새로운 저항의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킬시의 노동조합회관>

함대가 킬로 귀항한 다음날인 11월 1일, 제3함대의 전함 마르크그라프, 쾨니히, 바이에른의 수병 250명은 시내의 노동조합회관으로 집결해 체포자들의 즉각석방을 요구할것을 결의했다. 이런 병사들의 움직임을 항만사령부가 놓칠리 없었다. 그들은 병사들의 회합을 감시했고, 이들이 단순히 모임을 갖고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 끝날리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했다.

다음날인 11월 2일, 항만사령부는 병사들의 다음 집회를 예상하고 노동조합회관앞에 병사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포고문을 게시했다. 물론 포고문과 함께 강제력으로서 경찰도 함께 배치되었고 함대의 장교들이 나와 병사들의 귀함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날 노동조합앞에 모였던 500여명의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귀함하기를거부하는 대신,  시의 남단에 위치한 대연병장으로 집회장소를 바꿨다. 집회장소로 변한 대연병장에는 나중에 합류한 수병들을 포함해 총 600명의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집회에 참석해보신분들이라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집회에서 수명의 사람들이 연단에 올라 대중들앞에서 열변을 토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드물게 그 언변을 통해 대중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어 투쟁의 방향을 결정짖는 연사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어뢰정부대의 수리병인 칼 알테르트(Karl Artelt)가 이날 집회에서 그런 인물이었다. 

<칼 알테르트(Karl Artelt)>

독립사민당-1914년 전쟁 개전당시 사민당의 전쟁공채발행 찬성에 반대해 분당한 정당-의 당원으로 1917년 게르마니아 조선소에서 총파업을 선동하다가 6개월형을 언도받았던 알테르트는 병사들의 요구가 체포된 수병들의 석방에서 그쳐선 안된다고 입을 열었다. 그는 더 나아가 군국주의 타도와 지배계급의 제거를 주장했으며 필요하다면 폭력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테르트는 막스 공 내각의 종전을 기다리는병사들에게 직접 전쟁을 타도하자고 제기한 것이다. 이어 킬시의 독립사민당 대표로 집회에 초대받은 로테어 포프(Lothar Popp)가 연단에 올라 병사들에게 선언했다.

<로테어 포프(Lothar Popp)-전쟁으로 인해 노무자로 징집되었지만 이전 직업은 사탕가게 주인>

"노동자와 독립사민당은 병사들과 함께 할 것이다!"

집회는 노동자와 병사들의 연대에 대한 벅찬 감격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집회를 마치며 이들은 다음날 다시 대연병장에서 더많은 동지들을 규합해 집결하기로 결정했다. 11월 1일부터 이들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던 항만사령관 주숀(Wilhelm Anton Souchon)제독은 헌병대를 보내 집회 참가자들을 체포토록 했으나, 그가 헌병로부터 받은 보고는 "날이 어두워서 수배자들이 도망갔다"는 것이었다. 헌병들 마저 수병진압에 주저한 것이다. 헌병들 마저 주저하는 경향을 보이고 병사들이 극도로 격양되어 있는 상태에서 주숀제독이 이 사태의 진정을 위해 택할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대전초에 선양전함 궤벤을 타고 지중해의 영국군포위망을 뚫고 오스만제국까지 갔던 전쟁 영웅,
빌헬름 주숀제독, 사진은 한창 리즈시절때>


결국 그가 지휘관 회의를 통해 선택한 해결책은 다음날인 11월 3일 집회가 있기전인 오후 4시에 시내에 경보를 내어 수병들에게 귀대하도록 '냉정한 설득'을 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3함대의 크라프트 제독이 독자적으로 "불온한 수병"들을 체포하는데 나서는 바람에 군 방침의 혼선과 수병들을 더욱 격양시키는 결과 만을 낳고 말았다.

수병들의 저항이 시작된지, 세번째 날인 11월 3일, 다시 대연병장에서 집회가 열렸을 때, 집회에는 전날 참가 인원은 훨씬 상회하는 5천에서 6천명의 군중들이 모여 들었다. 수병들의 집회에 앞서 무관하게 진행되던 사민당의 집회에서, 알베르트와 포프가 인쇄한 노동자와 병사의 연대를 호소하는 삐라들이 배포해 많은 이들이 여기에 동조한 결과였다. 수천명의 새로운 참가자들이 투쟁에 참여하면서 이제 집회의 성격은 단순히 체포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전쟁반대, 자유, 그리고 빵을 요구하는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변화되었다. 급격하게 늘어난 시위대의 규모는 참가자들에게 어떤 격양감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들은 체포자들을 석방시키위한 직접행동에 나서기위해 구치소로 향했다.


<11월 3일,행진중인 군중들>


몇몇 헌병 분견대들이 저지를 시도했지만 오히려 시위대에게 무기를 빼앗기고 말았다. 일부는 아에 시위대에 동참해 버리기도 했다. 집회가 단순 항명을 넘어 반체제운동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주숀 제독은 더이상 냉정한 설득으로 상황을 진정시킬수 없다고 생각하고, 인근 알토나(Altona)에 주둔중인 육군부대에 병력증원을 요청하는 한편, 시위대가 구치소를 점거하는 것을 막기위해 신뢰할 만한 장교인 슈타인하우저 중위를 구치소에 파견했다.

슈타인하우저 중위는 구치소앞에서 병력을 배치해 시위대를 막아보려 했지만 6천명이 넘는 기세 등등한 시위대를 막기란 거의 불가능했고, 결국 발포명령을 내려 7명이 사망하고 29명이 다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발포에 놀라, 시위대는 흩어지고 말았지만, 결코 그냥 흩어지진 않았다. 이미 헌병들의 무기로 무장한 시위대는 흩어지면서도 슈타인하우저 중위의 부대에 응사했고, 일부는 다가가서 무기를 휘두르기도했다. 발포명령을 내렸던 슈타인하우저 중위도 시위대로부터 개머리판과 몽동이로 죽지 않을만큼만, 맞았다.


<어디서 그러지 않았던가? 맞을 각오가 안되있으면 때리질 말라고.>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포명령이 떨어지고, 사상자가 나오게 되면, 그 뒤에는 반드시 혁명세력의 급진화, 과격화가 따라온다는 것은  역사속에서 자주 증명되는 상황이다. 킬의 봉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음날인 11월 4일, 함대 지휘부는 전 병사들을 모아놓고 다시 한번 해군의 명령체계하에 복귀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알데르트에 의해 엉뚱하게도 장교들 대신 군을 운영할 병사 평의회의 투표장이 되버리고 말았다. 알데르트는 병사평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비슷한 시각, 시내에서는 노동자평의회가 열려 사민당의 구스타브 가브(Gustav Garbe)를 의장을 선출했다.
 

< 구스타브 가브(Gustav Garbe)>


병사평의회가 군을 장악함에 따라 항만에 정박중인 군함들에서는 하나둘씩 적기가 계양되기 시작했다. 전함 바이에른 호에서는 대규모 군중들과 함께 온 포프가 배에 올라 장교에게 병사들을 갑판으로 집결시키라고 명령한뒤 병사들앞에서 새시대의 시작을 연설하기도 했다. -포프는 나중에 이 장교가 처음엔 자기를 쏘려고 했지만 나중엔 어금니만 깨물더라고 회고했다.

<적기가 계양된 순양전함과 유보트들>


그러나 구체제 제국해군은 혁명의 물결앞에 그냥 고분 고분 쓰러지진 않았다. 크리스 하먼은 11월 혁명에서 아무도 카이저를 위해서 피를 흘리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그래도 호엔촐레른 왕조를 위한 마지막 충성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전함 슐레지엔은 마지막까지 혁명에 동참하길 거부하다가 다른 전함들의 포격위협으로 항국에서 추방당했고, 전함 쾨니히에서는 11월 7일까지 두명의 장교들이 함장 베니거와 함께 무기를 들고 적기를 계양하려는 수병들에게 저항하다가 사살되었다.-베니거는 살아남았다. 

한편, 시내에서는 알테르트의 지휘하에 무장한 수병들이 관공서와 철도를 장악해나갔다. 이제 더 이상 킬시에 대한 통제권이 항만사령관 주숀제독에게 있지 않다는 것은 제독 스스로가 봐도 명확했다. 오후 3시, 제독은 관저로 알테르트와 사민당, 독립사민당, 그리고 노동자평의회 대표들을 호출했고, 알테르트는 대형 적기를 내걸은 차량을 타고 관저를 찾아왔다. 알테르트는 이미 자신이 우위에 서있다는것을 알았기 때문에 주숀에게 다소 위압적으로 대했다. 우선 그는 제독에게 병사들의 표결로 인해 선출된 기구로서 병사평의회그리고 노동자 평의회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고, 제독은 당연히-다른 수단이 없으므로 이에 동의했다. 또한 알테르트는 제독에게 병사평의회를 진압하기위해서 병력을 끌여들이지 말것이며, 이미 동원한 병력이 있다면 즉각 철수시키도록 선언할것을 요구하면서 가벼운(?) 협박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3함대를 장악했소. 만약 진압군이 온다면 전함들로 장교막사를 날려버릴 테니 그리 아시오!"



<제국해군이 자랑하는 대양함대 전함들이 포격한다는데 알아서 기어야죠...>

주숀 제독은 이 역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날 오후, 주숀 제독이 알테르트를 기만한 것인지, 아니면 알토나의 제국육군이 주숀제독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파견한것인지 모르지만, 3일에 요청했던 알토나 주둔 제국육군대대가 킬에 도착했다. 하지만 육군과 수병들간의 격렬한 전투도, 알테르트의 복수에 찬 포격도 벌어지진 않았다. 병사평의회는 육군의 킬시 입성을 환영했고, 육군은 자진해서 장교들을 무력화시키고  병사평의회에 합류해 버린것이다.

<제독과의 협상을 마치고 제독관저를 나오는 노-병 평의회 대표들>

한편 베를린의 제국 정부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당황했지만, 막스 공과 사민당은 이 봉기가 볼셰비키화되는게 두려웠고, 군은 전선에 있는 제국육군을 불러 들여 진압을 시도할 시간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이들을 협상을 시도해야 된다는데 일치를 보았다. 이에 따라 사민당의원 구스타프 노스케와 국무대신 하우스만(Conrad Haußmann)이 킬시에 파견되었다. 하우스만과 노스케가 어떤 심정으로 킬에 입성했는지는 의문이지만, 킬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자신들의 봉기를 빌헬름스하벤에서 제독들의 반란을 막은 것의 연장선상으로 바라보았고, 이에 대한 사후처리로서의 막스 공 내각의 두 정치인 파견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중 노스케는 병사들과 노동자들에 의해 킬의 총독으로 선출되기까지 했다.


<봉기 이후 진행된 노동자-병사평의회의 행진. 맨 좌측이 노스케, 가운데가 알테르트, 우측끝이 포프>

하지만 이 선출은 이후의 역사를 생각하면 크나큰 실수였다. 노스케는 "누군가는 맹견이 되어야 한다."라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질서와 규율이라는 명목으로 바이마르공화국의 급격한 반동화에 일익을 담당했고, 결국에는 나중에 나치라는 헬게이트가 열리는 발판을 제공해 버렸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를 킬의 총독으로 선출한 탓하기도 힘들다. 2차대전이후, 알테르트나 포프는 왜 노스케를 총독으로 선출했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들 노동자-병사 평의회끼리도 누가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는 몰랐다. 하물며 베를린에서 온 노스케가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알지 못할수 밖에. 우리는 그저 그가 사민당 의원이란거 밖엔 몰랐다." 




덧글

  • 행인1 2011/01/26 23:35 # 답글

    전후 혼란기에 악명(?)을 떨치게되는 노스케의 등장이로군요.
  • Cicero 2011/01/27 08:38 #

    아마 이후 스파르타쿠스 봉기시기까지 다루게 된다면 그의 만행(?)을 보다 세밀하게 설명하게 될것 같네요.
  • DreamersFleet 2011/01/27 00:24 # 답글

    근데 독일 역사에 "혁명"이 있었나요? 전 없었던 것으로 기억했는데 요즘 이곳에서 많은 독일 "혁명"들을 보내요? 궁금합니다.
  • Cicero 2011/01/27 08:41 #

    큰것만해도 지금 여기서 설명하는 1918년 11월혁명,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 봉기, 1923년까지 이어진 독일국내 평의회공화국들, 여기에 더해 1989년 베를린장벽붕괴후, 통일까지 동독에서의 민주화혁명을 20세기의 독일혁명들로 구분되곤 합니다.
  • dnd 2011/01/27 10:35 # 삭제

    포스팅을보면서도 이런 소리하는건 난독증이나 무지의 정점.
  • DreamersFleet 2011/01/27 12:29 #

    dnd/ 언제 나한테 발린 적 있나.ㅋㅋㅋ. 환빠스럽긴.
  • DreamersFleet 2011/01/27 12:41 #

    어이. 일차원 비로긴씨. 혁명이냐 아니냐는 그렇게 칼로 물베듯 나눌 수 있는게 아니거던? 쌍욕밖에 모르는 주제에 감히 나 DreamersFleet 를 평가하다니... 이거나 읽어보렴.

    http://en.wikipedia.org/wiki/German_Revolution_of_1918%E2%80%9319#Contemporary_statements_and_historical_research
  • dnd 2011/01/27 17:10 # 삭제

    아악! 쉬발! 내가 존나 잘못했어! ㄲㄲㄲㄲ

    부탁이야! 날 웃겨죽이지 말아줘...ㄲㄲㄲㄲㄲ

    쉬발 넷질하면서 당당하게 "감히 나"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있다니...

    아우 배야....ㅋㅋㅋㅋ
  • young026 2011/01/28 18:18 #

  • deokbusin 2011/01/27 08:35 # 답글

    1. 어딘가에서 본 글인데, 1차대전까지의 독일해군 수병들중 상당수가 해상근무를 할 때를 제외하면 집에서 출퇴근했다고 합니다. 수병자원을 해안지대나 항구에서 차출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데, 덕분에 1차대전기에 후방의 자기네 가족들이 어떤 고생을 하는지 똑똑히 지켜본 수병들이 정부 전쟁지휘부 방침의 혼란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뭣인지를 생각해보면 저런 사태는 상당히 높은 확률로 발생했을 것 같습니다.


    2. 독일해군의 장교들이야 유틀란트에서 세계최고라고 거들먹거리던 영국해군을 물먹였다고 자부하고 있으니 휴전협상에서 독일에게 좀더 유리한 방향으로 마무리 지을려고 연합군 함대를 향해 출동하는 건 당연한 일로 생각했을 법합니다.


    하지만 그럴 바에는 러시아가 전쟁에서 탈락하던 1917년 11월에 실행하거나 지상에서 대공세를 펴던 1918년 전반기에 시행하는 것이 좀더 타당한 조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1917년 말에 이르면 미국해군이 스카파 플로우에서 영국해군과 합류하기 때문에 유틀란트에서 거둔 전과와 맞먹는 전공을 올렸을 지는 솔직히 의심스럽지만 말입니다. 사실, 미영 연합함대에게 독일해군이 도전했다가 호되게 박살나는 편이 독일국내의 정세에 도움이 되었을 것 같긴 합니다만.
  • Cicero 2011/01/27 08:49 #

    1. 그런 징병구조가 혁명에 시민들의 동참을 더욱 선동했다고 볼수있군요.

    2. 사실 유틀란트 이후, 보존해온 전력이 있으니, 결정적 한방을 생각해보는게 제국해군 수뇌부로서는당연한 입장일지도요. 그런데 만약 1917년말에 도전했다가처발려도 1918년 춘계공세까진 가고나서 퍼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춘계공세때 제국해군이 육군의 공세에 맞춰서 공격을 시도하는것도 상상해볼 법 하군요.
  • 들꽃향기 2011/01/27 22:55 # 답글

    저는 개인적으로 시위과정에 사민당이 비교적 빠르게 개입한 것이 눈에 띄네요. ㅎㅎ 올려주신 글 덕분에 여러모로 재미있게 잘 보고갑니다. ^^
  • Cicero 2011/01/28 09:27 #

    감사합니다.^^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독립사민당원들이 숫적으로 우월한 사민당원들에게 주도권을 "양보"하기도 했던 결과라는군요.
  • 2011/01/30 08:1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Cicero 2011/01/31 23:43 #

    오타안낸다고 신경쓰는데 자꾸 나는군요...
  • 야우리시민 2011/01/30 11:14 # 답글

    노스케 노스케라니 이게무슨소리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Cicero 2011/01/31 23:43 #

    누가 알았겠어요? 저런 놈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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