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틴아메리카인들의 역사에서 공통된 기억을 꼽으라면 아마 이베리아반도국가들에 의한 식민통치와 볼리바르의 해방, 그리고 군사독재를 꼽을수있을것이다. 앞서 두개의 기억은 나라마다 다를수있지만 군사독재는 라틴아메리카 모든 국가들의 뼛속깊히 파고든 참혹한 기억이다."
그리고 이 참혹한 기억을 어떻게 규정하고 정리하느냐는 라틴아메리카의 20세기 역사의 마지막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하지만 그들의 역사에서 이 문제의 해결은 결코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제3세계국가들이 그렇듯히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살아남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이들의 집권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군사독재정부의 압제자들 역시 민간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한 뒤에도 권력자로서의 자리를 유지했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영악하게도 정권교체후의 처벌을 피하기위해 사면법들을 제정해놓았다.-인터넷 검색하다가 Amnesty란 단어가 그토록 혐오스럽게 보일줄은 몰랐다.
하지만 최근들어, 라틴 아메리카국가들에서는 이 어둡고 움울한 과거의 유산을 청산을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 AP통신 기사에 따르면 그동안 다른 라틴 아메리카국가들에 비해 과거사청산에 적극적이었던 아르헨티나는 마지막 군사독재자인 레이날도 비요네(Reynaldo Bignone)를 다른 8명의 예비역장성들과 함께 살인과 고문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로서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를 지배한 군부독재자 4명 모두 재판을 받은것이다. -다른 독재자들중 한명은 사면되었으나 추가혐의로 사면이 취소되어 복역중이며, 다른 두명은 사망했다.

비슷한 소식은 칠레에서도 들려오고 있다. 지난 9월 2일 BBC의 보도에 따르면 칠레의 빅토르 몬티글리오 판사는 피노체트정권하에서 인권유린범죄를 저지를 129명의 전직 군경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오랫동안 짙게 깔린 피노체트의 망령에 감싸인 칠레에도 드디어 독재정부시절의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심판을 시작한것이다. 그동안 칠레는 과거 군정시절에 대한 청산이 미흡하긴했다. 피노체트가 죽을때까지 그를 처벌하지 못했고 도리어 그의 유족들과 지지 세력들은 너무나 당당하게도 이 독재자의 생가를 기념관으로 재건립했다.-그래도 국민세금으로 독재자 기념관만들자고 생떼쓰는 누구보단 나아보이지만...

<피노체트기념관에 있는 피노체트와 쿠데타군의 주역들의 두상>
칠레정부는 2004년, 피노체트 통치기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으로 피해자와 그 유족 2만7천명에게 월간 최소 190달러를 지급하기로 결정했지만, 참혹했던 기나긴 군사통치기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으로는 충분치 않아보인다. 칠레의 과거사청산은 오히려 민간부분에서 활성화되었다. 영국 릭스은행은 아직 피노체트가 생존해있던 2005년, 피노체트의 비자금을 숨기고 세탁하는 역할을 해온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9백만달러를 칠레의 아옌데 재단에 기부했으며, 2006년에는 피노체트 통치기의 경찰청이 아옌데 기념관으로 재건축되기로 걸정되었다. 아마 이번 결정이 미진했던 정부의 과거사 청산 에 새로운 자극이 될것으로 보인다.
과거사 청산의 바람은 라틴 아메리카국가들중에 비교적 군사독재의 유산이 심하지 않은 브라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브라질은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0여년의 군부통치를 받으며 500명 가량이 사망하거나 실종된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른 남미국가들에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수치다.-가장 악랄한 통치로 꼽히는 피노체트집권하의 칠레가 최소 3천명에서 최대 만명의 희생자가 잇는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말이다. 덕분에 브라질은 민정으로 이양된 이후 최근까지 "굳이" "과거사 청산에 적극적이지 않은 국가"로 불려왔다. 하지만 이제 브라질도 그 불명에스러운 칭호를 버리게 되었다. BBC보도에 따르면 룰라의 좌파정부가 수립된 이후 2004년부터 과거사청산을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얼마전 군부독재시절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발족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의 바람은 "인권에 대한 존중"과 "반 인륜적범죄에 대한 공소시효없는 처벌"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길만한 소식일것이다. 그러나 이변화가 쉬울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라틴 아메리카의 군사독재들이 대부분 오랜기간 통치하면서 그 잔여세력을 사회에 뿌리박은 데다가, 지금 변화가 시작된 시점에서 이미 상당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덕분에 구 군사독재시절에 어떠한 식으로든 연관된 이들의 저항은 피할수 없다.
앞서 밝힌데로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과거사 청산에 적극적이었던 아르헨티나의 경우에도 군사독재시절 하위 장교로 복무했던 이들은 자신들이 명령에 따른 죄밖에 없다고 정부에 항의했고 1989년, 이들에 대한 사면법이 제정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국민화합적 차원"에서 독재자 두명에 대한 대통령 사면이 이루어지도 했다. 2002년에는 독재자 레오폴도 갈리테리가 법정에 섰을때에는 일각에선 불만을 품은 군의 쿠데타를 염려하기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또한 최근 우르과이에서는 군사독재시절 국가범죄에 대한 사면법에 대해 대법원이 위헌으로 판결하고, 독재자 그레고리 알바레즈(Gregorio "Goyo" Alvarez)에게 25년형을 언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면법 폐지에 대한 국민 투표에서 52%의 반대로 법안이 유지되기로 결정된것을 보면 라틴 아메리카국가에서 군사독재의 유산을 일소한다것은 그리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칠레에서는 피노체트를 여전히 "우리 장군님"으로 받드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고-앞서 말했듯히 기념관을 지을정도로-, 브라질에서는 룰라의 임기가 1년반가량밖에 남지 않아, 다음 선거의 결과에 따라 과거사청산문제가 크게 영향받을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과거사청산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으로 생각된다. 적어도 이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군사독재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없는데다가, 군사독재청산을 위한 각 국가들의 정부와 시민사회간의 협조가 더욱 긴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군사독재가 낳은 결과인데, 과거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칠레의 피노체트정권주도하에 반정부인사를 추적해 제거하는 군사독재자들의 협조체제인 콘도르작전을 시행한적이 있었다. 오늘날 과거사청산을 위한 라틴아메리카의 국경을 넘어선 협조는 이 콘도르작전에 대한 추적과 수사를 위해서 시작되었던것이다. 우르과이의 독재자, 알바레즈의 체포 역시, 아르헨티나에 체류중인 알바레즈를 우르과이정부의 요청에 따라, 아르헨티나정부가 체포한것이었다.
또 한가지 간과할수없는 점은 바로 국민들의 인식의 변화 문제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라틴아메리카의 독재정부들이 저지른 만행이 하나씩 하나씩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거, 그에 따라 군사독재에 대한 냉정하고 정확한 국민들의 평가가 점차 가능해지고 있다. 자신이 사면법 페지 찬성의 표를 던졌다고 밝힌 어느 우르과이의 시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면법폐지를 위한 국민투표는 1989년에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군사정부가 무너진지 얼마지나지 않은지라 57%가 폐지에 반대했죠. 이번에는 53%였죠. 다음번에는 우리가 이길 겁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우리편이니까요."
"우리는 정의를 원합니다. 그건 우리의 정당한 권리에요."
브라질군사독재에게 형제자매를 잃은 라우라 페티트씨의 말이다.




덧글
대한민국 친위대 2009/11/08 17:52 # 답글
과거라는건 깨끗하게 정리해야 되는데...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뭐랄까. 과거를 정리하기 싫어하는 인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과거의 더러운 유산들을 간직하고 싶어 난리니;;;
Cicero 2009/11/08 18:48 #
"그러면서 그분들 하시는 말씀은 과거에 얾매이지 말자."얾매이지 않기위해선 청산해야 하는데 말이죠.
rumic71 2009/11/08 18:37 # 답글
왕년의 <5공 청산>과 청문회 시절이 생생하게 떠오르는군요. 어떤 의미로는 전장군 덕에 대통령이 된 사람도 생겼고...
Cicero 2009/11/08 18:48 #
그때 그시절이랑 많이 닮았죠. 어떤면에서는 우리보다 한 수 위이기도 하고요.
들꽃향기 2009/11/08 19:08 # 답글
삐노셰의 기념관이 아직도 있었군요;;; 왠지 일해공원 남미버전을 보는 듯하여 씁쓸합니다.
Cicero 2009/11/08 21:00 #
그나마 국민세금으로 만든게 아니라는게 다행입니다. 일해공원이야 지자체장이 저러니...
blue ribbon 2009/11/08 21:56 # 답글
한국과 동남아시아 중에서 더 안좋은 독재자가 한국에 있었다는 사실.
Cicero 2009/11/08 23:50 #
수준은 좀 다르긴 하지만 청산해야될 존재라는데는 공통점이죠.
곰돌군 2009/11/08 23:23 # 답글
대한민국의 과거사 청산이 보다 까다로운 이유는, 단순히 "그때 그분들" 이 멀쩡히 살아 있는몸통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궂이 비유하자면 각론이 본론을 흔드는 경우가 많다고 할까요?
어떤식으로던 과거사 청산은 해야겠고, 이미 여러차례 시도도 있었고, 그런데 뚜렷하게 성과는
없고.. 거기에다 설상 가상으로 과거사 청산하자고 하면 그 범위가 언제부터 어디까지 인지
명확하게 주체를 잡지도 못하고 있어요, 친일파 청산이 군사 독재 처벌로 이어지고 그인물이
그인물이고.. 막상 청산을 주도하는 세력도 내부적으로 어디서 부터 어떻게 청산해야 할지
뚜렷하게 정하질 못하고 있는 판국이니..
Cicero 2009/11/08 23:49 #
남미의 경우와 한국이 뚜렷하게 대비되는것이 1.군사독재의 막장성과 2.군사쿠데타로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라는 부분에서 강하게 대비되는데 이게 과거사청산정책과 맞물린다고 합니다.일단 남미의 군사독재같은 경우엔 군대를 동원한 내전적인 학살행위, 그리고 정치적 살인과 가혹행우ㅢ라는 면을 보면 그야말로 기가차서 말이 안나올정도입니다. 그에 반해 한국의 독재자들은 그야말로 "상대적으로" 덜죽였죠.
또 남미국가들은 군사독재 이전에 있던 정치체제에 관해 강한 향수를 가집니다. 아르헨티나의 2차 페론주의 정부나 칠레의 아옌데정부가 대표적이죠. 이게 군부독재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요. 하지만 한국은... 뭐랄까... 민주당 제2공화국과 최규하정부하의 짧았던 서울의 봄에 관한 향수는 찾기 힘들죠.
곰돌군 2009/11/09 00:01 #
하긴 뭐, 군사 독재 이전에 있었던 정부들이 뭐하나 뚜렷하게 보여준게 없으니 말입니다.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그나마 엄청나게 꼬인 일도 없어고 해서
좀 나은거지만, (그 이전에 김영삼 정부의 실정이 크기도 했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엄청난 인권 유린과, 고문, 투옥, 광주 사태 등이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한국은 비교적 확실하게 최 빈곤 국에서 개발 도상국 수준으로 올라선 공과가 있으니
이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감상이 복잡할수밖에 없을 겁니다.
LVP 2009/11/09 00:50 # 답글
일단 친일인명사전 나왔으니, 우리도 기대해보자우.일단 옆집처럼만 안되면, 대성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