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로키족의 전사추장, 남군의 기병 준장, 스탠드 와티(1) side of history

18세기 말의 미국의 독립은 북아메리카에 거주하고 있던 일부 백인들에겐 축복받은 새로운 시작이었지만, 북미지역 원주민들에겐 차라리 재앙에 가까웠다.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지적처럼, 영국으로부터 독립의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영국정부의 백인들의 서부 진출제한이었다는 점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북아메리카에 탄생한 이 신생공화국은 원주민들에게 극도로 불친절한 국가였다. 원주민들은 이 새로운 백인들의 국가에서 생존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했다. 어떤 이들은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백인들에게 저항했고, 어떤 이들의 백인들의 삶에 적응하고 동화되어 사는 길을 택했다.

미국 남부에 살던 체로키부족의 경우에는 후자를 택했다. 이들은 백인들처럼 교회에 다니고  스스로 문자와 헌법을 갖추고 선출된 추장과 의원들이 이끄는 정부를 만들기도 했다. 그결과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체로키족은 백인사회에 동화되는데 성공했고, 일부는 노예농장주로 성장하기도 했다. 물론 전체 체로키인의 8%에게 해당하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런 백인과 유사한, 혹은 동화된 사회구축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체로키족에 대한 연방정부의 압박은 계속되었다. 1818년, 연방정부는 테네시주지사인 조셉 맥닌(Joseph Mcnin)을 보내 20만달러의 보상금을 대가로 조지아에 거주중인 체로키족에게 미시시피강 서안으로의 이주를 요구했다. 물론 체로키족의 대표였던 존 로스(john Ross)는 거부했지만 연방정부의 요구는 집요했다. 연방정부는 맥닌 대신 전쟁부장관 존.C.칼훈(John.C. Calhurn)을 새로운 채로키족 이주 담당자로 내세웠다.

<존 로스. 체로키족의 대변인이자 대추장>


고향대대로 내려온 땅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던 체로키인들이었지만, 점차 그저항의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체로키족 내부에서 연방정부의 이주정책에 동의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체로키내부의 순혈 유력 가문출신인 메이저 릿지(Major Ridge)와 데이비드 와티(David Watie)를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두 가문 합쳐 1,600명에 이르는 노예를 보유하며,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고 있던 이들이 자신들의 농장을 버리고 이주하는데 동의를 표했다는것은 분명 쉽게 납득하기 힘든일일것이다. 이에 대한 릿지와 와티의 주장은 이랬다.

<메이저 릿지>



"어차피 자신들이야 이미 백인사회에 동화되었으니 상관없지만, 가난하고 노예도 없는 일반 부족민들은 백인사회에 머물러봤자, 백인들에게 이용당하고 폐인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이럴바엔 차라리 백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삶을 꾸리자. 게다가 우리가 얌전히 떠나지 않으면 연방정부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쫏아낼텐데, 그럴바엔 돈받고 얌전히 떠나는게 낮지 않겠는가?

즉 자신들의 이익보다는 부족민들을 위한 구국의 결단이라는거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이런 부족의 미래에 대한 염려 못지 않게 권력다툼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1827년, 체로키족 대추장인 패스킬러가 사망하자, 체로키족 의회는 선거를 통해 연방정부를 상대로 부족의 땅을 지켜내고 있던 존 로스를 차기추장으로 선출했는데, 그는 순혈 체로키족이 아닌 1/8의 혼혈이었다. 게다가 그는 서부로의 이주를 거부하는 대다수 "일반 서민" 부족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니. "순혈 대부호"인 릿지와 와티로서는 그리 달가운 대상은 아니었을것이다.

부족을 위한 결단이든, 혹은 권력 다툼이든, 체로키족의 내분은 당장이라도 인디언들을 태평얀 연안까지 쫒아내고 싶어했던 미합중국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에겐 좋은 기회였다. 잭슨과 미정부는 이 두집단사이의 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내분을 심화시켰다. 결국 1835년, 이주를 주장하는 릿지와 그 세력의 압력앞에 로스는 연방정부가 요구한 이주협정에 사인해야했다. 그리고 이 협정의 결과로 1838년, 체로키족은 미시시피강 서안으로 이주해야 했고, 이주와 이후 정착하는 동안 로스의 아내를 포함해 4천여명 가량이 질병과 기아로 사망했다.


<체로키족의 '눈물의 길' 행로>

 


이 처참한 비극으로 가족을, 그리고 이웃을 잃어야 했던 체로키인들은 릿지와 그의 세력을 증오했다. 더군다나 "눈물의 길" 이후 다시 서부에 정착하면서 부족민들이 죽어나가자, 마침내 부족민들은 릿지 일파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1839년 6월 22일, 30여명의 무장한 군중들이 아칸소주 북서쪽에 자리한 릿지가의 집마당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집문을 부수고 들어가 메이저 릿지의 아들 존 릿지를 칼로 수차례 찔러 죽였다. 정작 메이저 릿지는 집에 없어 그자리에서 죽진 않았지만 그의 운명도 별다르진 않았다. 그는 워싱턴 카운티의 소주택가 도로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벌목꾼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

릿지가 뿐만 아니라, 릿지에 협조했던, 그리고 가까웠던 모든이들이 보복의 대상이었다. 릿지가와 가까운 와티가의 바운디넛(Boundinot)은 릿지가족의 참변이 있던곳에서 몇마일떨어진 곳에 친구의 집을 짓는 것을 돕고 있었다. 그때 세명의 체로키인이 찾아와 부족의 약사인 바운디넛에게 약을 달라고 부탁했고 그가 약을 가지러 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한명은 그를 등뒤에서 찔렀고, 다른 한명의 그의 목을 잘랐다.

바운디넛의 동생이었던 스탠드 와티 역시 이주반대파의 보복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이주반대파 부족들에게 스탠드 와티를 제거하지 못한것은 최대 실수였다. 이제 체로키족의 강력한 전사중 하나인 그가 가족들과 지인들의 복수를 위해 나설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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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LVP 2009/04/03 12:47 # 답글

    듣자하니, 앤드류 짹순(?) 스스로 원주민을 졸라 뚜드러팬 걸로 돈벌었다드마는...

    오늘 미국 사회의 마이너 계층(?)에 대해서 학교에서 얘기하던데, 아시아계/히스페닉(라티노)/흑인/원주민 중에서 제일 X같은 게 원주민이라고 한 얘기가 귀에 선하네..

    ※그러고보니 우리가 메신저로 운디드니 얘기하고 있던 날에, 'Our Lives? Ask the Government'라고 쓰여진 수우족 원주민 초상이 그려진 티샤쓰(?) 입고 왔드라...
    (한국과 -14시간이니까, 얘기하고 난 다음날이 그날이라고 보면 됨)
  • Cicero 2009/04/04 09:38 #

    혹시 그런거 가게에서도 팔어?
  • 윤민혁 2009/04/03 18:00 # 답글

    체로키족이 왜 남부동맹 편에 서서 싸웠는가에 관심이 있었는데,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Cicero 2009/04/04 09:37 #

    기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ghistory 2009/04/04 10:31 # 답글

    칼훈→캘훈입니다.

    조셉→조지프.
  • 迪倫 2009/04/04 14:33 # 답글

    네이티브 어메리칸 중에는 미국 연방정부를 지금도 남의 정부처럼 보는 이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약간 다른 예이긴 하지만 원래 미국 원주민 중 이로콰이족의 축제에서 유래된 운동인 라크로스의 경우 이로콰이족은 별도 연맹을 구성하고 국제 대회에도 미국 대표가 아니라 "이로콰이 네이션"으로 출전을 하더군요.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 은퇴하신 신부님이 자기는 32분의 1 네이티브 아메리칸인데, 백인들이 자기들에게 참 못할짓 많이 했지하고 얘기하시더라구요(그냥 보기에는 백인인 미국 성공회 신부님이신데)
    독립전쟁때도 영국군에 가담한 원주민들은 나중에 대부분 캐나다로 이주를 해서 정착했었습니다. 미국 연방정부는 날때부터 안티 미원주민이었다고 해야할런지..
    체로키 얘기는 좀 흥미롭네요. 저도 기대합니다.
  • Cicero 2009/04/04 23:09 #

    재밌는 사례로군요. 정보 감사합니다.
  • imsong 2012/05/30 04:01 # 삭제 답글

    이야 정말 고맙습니다 이거 과제하는데 정말 엄청난 도움이 됐군요 다시한번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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