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발디 여단, 이탈리아 해방의 숨은 공로자들(1) ㄴWW 2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붕괴


1943년 8월, 이탈리아가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의 수장이었던 무솔리니는 권력에서 축출당해 연금당했다. 이탈리아는 20년 가까이 드리웠던 파시즘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듯 싶었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은 그렇게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탈리아를 점령하라!"

파시스트들의 동맹자인 나치독일은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 파시스트괴뢰공화국인 살로공화국을 건국하고 그 지도자에 연금상태에서 구출한 무솔리니를 앉혔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파시즘의 또 한번의 발악이 시작된것이다.
 

<살로공화국의 프로파간다 포스터, 연합군이 점령한 남쪽과 파시스트정부가 있는 북쪽을 대비해 파시즘 정부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있다.- 진실과는 상관없이.>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 총사령관 케슬링은 살로공화국과 그너머의 나치 독일, 두 파시즘 정권을 위해 고딕라인이라 불리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이 이탈리아반도의 파시즘 성채는 생각했던 만큼 강하지 않았다. 민중들은  파시스트들이 집권했을때1920년대와 달랐다. 그들은 그때처럼 이 검은 옷의 집단들이 권력을 잡고 휘두르도록 방관하기보다는 스스로 나서서 이들을 제압하고 연합군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반 파시스트운동의 부활

이탈리아에서 반 파시즘운동의 역사는 파시즘의 역사 만큼이나 길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처음으로 파시스트당을 결성하고, 폭력의 수단으로 검은 셔츠단을 결성했을때,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 공산주의자, 심지어 퇴역군인들까지 포함된 반 파시스트 단체인 Arditi del Popolo (민중의 부대)가 1921년 결성되어 검은 셔츠단과 대립했었다. 비록 몇년뒤인 1920년대 중반, 내부의 이념갈등과 파시즘의 득세로 인해 붕괴되고 말았지만 이것이 이탈리아 반 판시즘 무력투쟁의 시작이었다.

<Arditi del Popolo >


그리고 1943년 말부터, 이탈리아의 연합군 합류와 살로공화국의 건국등의 사건이 이어지자, Arditi del Popolo를 계승하는 무력투쟁이 이어졌다. 파시즘 치하의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심지어 왕정주의자들까지 합류한 반 파시즘 저항조직인 CLN(Comitato di Liberazione Nazionale:조국해방위원회)이 구성되었으며, 실질적인 무장투쟁을 위한 파르티잔 부대인 가리발디여단들이 창설되었다. 가리발디 여단이라는 이름에서 알수있듯히, 이들은 스페인내전에 참전했던 이탈리아인 부대 가리발디여단을 계승하고 있었고, 실제로 많은 스페인 내전 참전용사들이 이들 가리발디여단들을 구성하고 전투를 벌였다.

연합군 정보국들은 이들 가리발디여단이 가능성에 주목했다. 만약 이들이 유고나 동부전선의 파르티잔들처럼 후방을 교란하고  적의 정보를 빼돌리고, 나아가 파시즘 점령하의 도시까지 해방시킨다면? 뭐 모든 파르티잔들이 유고나 동부전선에서 처럼 먼치킨급 능력을 가질수있냐고 반문할수있겠지만, 연합군정보국들에 있어서 이건 망상이 아니었다.

연합군은 이미 파르티잔들 덕분에 상당한 이득을 보았다. 특히 정보수집분야에서 말이다. 1944년 2월, 안지오전투도중 케슬링이 히틀러의 명령으로 카세르타의 연합군사령부를 목표로 총공세에 나선 적이 있었다 파르티잔들은 케슬링의 사령부에서 직접유출된 정보로 연합군에게 공격을 알렸다. 무려 하루에도 5번 가까이 로마의 OSS 라디오로 송출된 이 정보를 통해 연합군은 케슬링의 공격에 대비할수있었다. 반면 연합군의 암호해독체계는 공격이 시작된 3일만에 이공격이 카세르타를 목표로 한것임을 파악했다. 만약 파르티잔들의 제보가 없었다면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이 장기화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파르티잔, 전선에 서다.

1944년 9월, 연합군 이탈리아전선의 사령관 알렉산더가 고딕라인의 돌파를 명령하면서 파르티잔들이 단순한 정보수집이나 후방교란 임무가 아닌 본격적인 전투 작전에 참여하게된다. 이들은 전방에서 전진해오는 연합군과 함께 후방에서 독일군을 협공했다. 이러한 협공은 높은 전과를 거두기도 했고, 몬테 바타글리아전투에서 처럼, 연합군 단독이었다면 많은 희생을 치뤘을지 모를 전투에서 결정적 도움이 되주기도 했다.

1944년 9월 21일 새벽, 미군88사단 350연대와 351연대가 고딕라인의 마지막 남은 장애물인 몬테 바타글리아를 점령하기위해 진군했다. 하지만 몬테 바타글리아로 향하는 계곡길은 매우 협소했고, 끊임없이 내리는 비와 안개 때문에 시야 확보도 쉽지 않아 전투가 벌어지면 막대한 피해는 피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미군이 진군하는 방향 독일군 진지 너머에는 제32가리발디여단이 독일군에 대한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합군 정보국에 밥이라고 알려진 지휘관이 지휘하는 이 부대는 총 1,200명의 병력으로 이들에 의해 6월에서 8월 사이에만 30,000에서 3,5000의 독일군 사상자가 발생한것으로 악명높았다.

9월 25일 밤, 밥은 400명의 파르티잔 병력과 함께 몬테 바타글리아를 방어하고 있는 독일군의 후방을 습격했다. 독일군은 전방과 후방 양측에서 모두 공격당하자, 사실상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했다. 인근 몬테 칼네발레의 독일군이 위기에 빠진 아군을 구하기 위해 증원에 나섰지만, 파르티잔들과 미군의 협공에 또다시 분쇄되고 말았다.

이러한 파르티잔과 연합군의 협공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붕괴시켰다. 결국 케슬링은 방어선을 재편해야했고, 파르티잔들에 대한 복수에 나섰다. 그는 다른 전선의 독일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파르티잔과 그에 협조한것으로 보이는 시민들을 학살했다.

아데틴, 마르자보토, 산 안나 디 스타제마...

<최근 미국에서 개봉한 '세인트 안나의 기적'도 독일군에 의해 자행된 이탈리아 민간인학살을 다루고 있다.>


44,700명의 파르티잔이 사망했고,  21,200은 부상당하거나 실종되었다. 그리고 15,000의 민간인이 파르티잔들과의 협력을 이유로 살해당했다.

<한 이탈리아인이 살로공화국 군부대 X MAS를 쐇다는 이유로 공개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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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ghistory 2009/02/17 19:27 # 답글

    도끼가 파쇼를 내려치는 포스터가 인상깊습니다. 어디서 얻으셨는지요?
  • Cicero 2009/02/17 19:55 #

    위키피디아의 Arditi del Popolo 항목에서 찾았습니다.
  • ghistory 2009/02/17 20:03 #

    감사합니다.
  • 들꽃향기 2009/02/17 23:22 # 답글

    잘 읽고 갑니다. 비단 이탈리아 통일전 뿐만 아니라, 보불전쟁(프랑스 공화정 측을 '자유진영'으로 해석한 괴악한 면에서이긴 하지만), 스페인 내전 등에서 이어진 가리발디 여단의 이름을 계승할 만한 이들이었군요.
  • 계원필경&Zalmi 2009/02/17 23:27 # 답글

    몬테 바타글리아라면 메달 오브 아너 브레이크스루에서 나오는 마지막 미션인가 그럴겁니다...(랄까나 거기서 워낙 많이 죽어서 말이죠 ㅎㄷㄷ....)
  • LVP 2009/02/18 13:43 # 답글

    파스케스를 여기서 오랜만에 보네...

    무대리나 그양반 똘마니나 로마 군단과는 Dog-Horn(?)도 상관없으니 뿌셔버려야 마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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