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계곡길
엘핀스톤이 이끄는 영국군이 잘랄라바드를 향해 출발했던 1월 6일, 이 힘겨운 여행길에 불길한 전조들이 보이기시작했습니다. 우선 그들은 아프간측의 요구에 따라, 1문의 야포와 3문의 산악포를 제외하고는 모든 포를 두고 가야했고, 가는길을 호위해주겠다는 아크바르와 그의 병력은 약속했던 시간이 되도록 도착하지 않아, 영국군 단독으로 출발해야했죠, 악재는 겹쳤습니다. 이미 출발 이전부터 사령관인 엘핀스톤에게 건강상에 문제가 있는데다가 병력의 3배나 많은 민간인들을 동행하고 있는 탓에 행군속도가 지나치게 느렸고, 불과 6마일을 행군한 지점에서 휴식을 취해야했습니다. 행군의 마지막열까지 휴식장소에 도착한건 새벽2시, 게다가 아프간의 혹독한 겨울로 인해 제대로 휴식을 취하기도 어려웠죠. 충분한 텐트가 없었던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눈밭에서 자야했고 그탓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음날 오후, 아크바르가 영국군진영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엘핀스톤에게 "어째서 자기가 준비되기도전에 출발했냐?"며 화를 냈죠. 그리곤 이제부터라도 호위를 해줄것이라고 약속하며 금과 인질을 요구했습니다. 엘핀스톤은 아크바르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다시 몇명의 영국인들이 아프간인들의 인질이 되었습니다. 아크바르는 덤으로 자신이 이지역부족들과 영국군의 무사통과를 위한 협상을 할 동안 대기하라고 요구했고, 엘핀스톤은 이마저도 수락합니다.
그러나 , 영국군이 쿠르드-카불 고갯길에 들어섰을때, 아크바르가 말했던 협상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게 됩니다. 무장한 아프간인들이 고개위에서 자신들을 굽어보고 있던거죠. 그러나 이 좁은 고갯길은 그들이 몸을 숨기기에도 다시 방향을 돌려 후퇴하기에도 적당하지 않은 곳이었고, 곧 처절한 학살이 시작됩니다. 이날의 습격으로 영국군은 3천명이 죽거나 부상당하죠. 수많은 영국군이 총에 맞아 죽거나 얼어죽거나 혹은 자살했습니다. 몇백명의 영국군은 다시 계곡을 가로질러 카불로 돌아가려했지만, 아무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참극이 있은 뒤인 1월 9일, 아크바르는 다시한 번 안전한 통행을 약속하며 인질과 금을 요구합니다. 엘핀스톤은 이미 아크바르에게 한차례 속았지만 거절할수없었죠. 영국군은 인질과 금을 아크바르에게 넘겨주었지만 예정이나 되었다는 듯히 아프간인들의 공격은 계속됩니다. 이틀동안 영국군은 아크바르의 약속과는 다른 아프간인들의 공격을 받으며 힘겹게 진군했고, 1월 11일 아크바르는 다시 한번 엘핀스톤에게 협상을 제안 합니다.
아크바르는 이 세번째 협상에서 영국군의 가족을 인질로 요구했습니다. 엘핀스톤은 이전의 두협상에서 처럼, 이에 묵묵히 응해주죠. 하지만 아크바르가 원했던건 영국군의 가족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협상 도중, 엘핀스톤과 그이 참모 셸튼준장을 납치해버립니다. 엘핀스톤이 납치된 후, 아프간인들은 영국군을 향해 다시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제 영국군은 병력 200에 민간인 2000의 규모로 줄어들게 되죠. 출발했을때 규모의 한줌 밖에 남지 않게 된겁니다.

이제 이 얼마 안남은 병력은 안퀴틸 준장의 지휘하에 탈출하기위해 다시 행군을 지속하지만, 이들의 앞엔 아프간인들이 도로를 장애물로 봉쇄하고기다리고 있었죠. 안퀴틸장군이 야밤에 행군을 감행했던 덕분에 이 장애물은 다행히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고, 영국군은 이를 돌파하는데 성공합니다. 대신 값비싼 대가를 치뤄야 했죠. 2200명의 영국군과 민간인들은 이제 100명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영국군은 포위망을 돌파한뒤살아남은 70여명은 자랄라바드로 부터 50Km가량 떨어진 간다마크라는 마을에서 아프간인들과 마주칩니다. 보유하고 있던 소총도 20정밖에 되지 않았던 이들이 조그만 둔덕위에 올라 방진을 치고 최후까지 항전을 준비하자, 아프간인들은 항복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영국군은 항복을 거부하죠.

"Not bloody likely!"
아프간인들은 이 고집스러운 적들을 향해 최후의 공격을 가합니다. 이미 지칠대로 지치고, 탄약도 모자른 영국군병사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대영제국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저항하다 2명의 포로를 남기고 전멸합니다. 한편 이들중에서도 말을 타고 있던 6명은 가까스로 이 마지막전투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죠. 하지만 그들도 곧 아프간기병대의 습격을 받았고 이들 중 단 한명, 외과의사 윌리엄 브라이든만이 살아남아 1월 13일, 잘랄라바드성벽앞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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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차 아프가니스탄전쟁에 마지막 자랄라바드 공방전과 영국군의 카불재점령만 남겨두고 있네요. 이거 끝내고도 포스팅할만한 소재는 쌓여있으니...기뻐해야 되나?...^^;;;
이번 편의 글을 작성하던 도중, 아마 아프가니스탄계로 보이는 사이트에서 흥미있는 주장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이른바 '아크바르 칸을 위한 변호'라고 칭할만한 글이었는데요. 이 글에 따르면 아크바르 칸은 공격을 막아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싶어서 어긴게 아니라는 겁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영국에 잡혀있는 상황에서 영국의 분노로 아버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걸 막기위해서라도 영국인을 보호하기위해 아크바르는 애를썻다는 거죠. 그러나 영국인에 대한 각 지방 부족장들의 분노는 아크바르가 억제시킬수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아크바르는 인질이라는 형태를 통해 가급적 많은 영국인들을 구해주려 한것이라더군요. 어느정도 설득력있는 주장인것 같은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태그 : 아프간전쟁




덧글
슈타인호프 2009/02/06 22:21 # 답글
인질로 간 영국인들이 아크바르에게 어떤 처우를 받고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본다면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월광토끼님의 다음 글을 기다려야겠군요^^;;
Cicero 2009/02/06 23:23 #
영국인 인질들 이야기는 최종편인 다음편에 소개할 예정입니다.근데 월광토끼님도 아프간전쟁관련 글 준비하시나요?
슈타인호프 2009/02/06 23:45 #
헉, 전에 월광토끼님이 올리시던 글 때문에 헷갈려 버렸습니다. Cicero님 죄송합니다. 이 죄를 ㅠㅠ
Cicero 2009/02/07 09:17 #
아뇨.;;; 괜찮습니다.^^;;;;
월광토끼 2009/02/07 10:21 #
제가 예전에 쓴 적 있던 "마이완드의 영웅 견공" 글 때문에 그렇게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
계원필경&Zalmi 2009/02/07 02:35 # 답글
어떻게 본다면 침략자에 대한 처절한 응징으로 표현할 수 있겠군요(...랄까나 맨 밑의 주장이 좀 신빙성이 있는 거 같은...)
Cicero 2009/02/07 09:15 #
'우호적인 정권을 세우기 위한 침략'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예라고 할수있겠죠.그리고 위의 주장같은 경우엔 분명 설득력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크바르의 학살책임을 회피시켜주진 못할것 같네요.
윤민혁 2009/02/07 04:50 # 답글
아크바르가 영국군과의 약속을 어길 의사 자체는 없었다는 쪽은 저도 부분적으로 동의합니다. 만약 아크바르가 처음부터 약속을 어길 생각이었다면 인질을 달라고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다만 사람을 구하려는 의도보다는 다른 의도가 더 컸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영국이 복수하러 올 테니, 그때 흥정용으로 쓸 생각이었다는 정도로요.
Cicero 2009/02/07 09:17 #
공감합니다. 제생각에는 이후 영국의 보복을 염려한면도 있지만, 인도에 있는 아버지의 신변을 고려한 면도 크지 않았나 싶네요. 아버지가 인질로 잡힌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영국인을 인질로 잡는다면 영국이 현 상황에 대한 보복으로 무함마드에 대한 위해를 가하는 것을 막을수있다고 생각한면도 크지 않을까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