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라. 알자스인들이 스스로를 알자스인이라고 느낄수록 프랑스를 잊게 될것이다."
1871년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의 결과로 알자스-로렌지방이 독일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될 당시, 독일제국의 수상 비스마르크는 이지역을 통치에 관해 위와 같은 조언을 남겼다. 하지만 이 조언도 그가 독일제국을 위해 했던 수많은 다른 조언들과 함께 묻히고 잊혀졌다. 제국은 알자스-로렌지역을 제국의 일부로 보지 않았다. 그곳은 프러시아의 군인들에게 있어선 새로 점령한 점령지로 비스마르크제도나 아프리카의 식민지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제국령(Reichsland)으로 대우받았다. 물론 이러한 차별조치는 1911년에야 풀리긴 했지만 1871년 독일에게 병합된뒤, 40년동안 받아왔던 차별은 알자스-로렌지역 주민들에게는 반독일 감정과 프랑스에 대한 향수를 고양시키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런 감정은 공공연히 독일을 상대로-특히 군인들-분출되었고 독일 역시 이런 주민들의 움직임에 대해 곱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3년 알자스-로렌지방의 인구 9천명의 소도시인 자벤에는 폰 로이터대령의 제99보병연대가 주둔중이었는데, 그 부대 소속인 20살의 폰 포스트너 소위는 전형적인 '도련님'이라는 이유에서 인근 제철공장의 노동자들에게 자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군인들에 대한 민간인의 조롱이야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야 흔하디 흔한일이지만, 근 100년전의 독일에선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하기사 독일주재 미국대사로 1차대전 당시 독일체류기를 책으로썻던 제임스.W.제랄드(James W. Gerard)는 독일사회에서 군이 민간에 대해 갖는 우위에 대해 아래와 같은 사례를 들어 묘사했다.
'"프러시아은 포탄에서 태어났다."라는 나폴레옹의 표현대로 독일은 철저하게 군을 우위에 두는 사회체제와 통념을 가지고 있다...어느날엔가 표를 사기위해 줄을 서고 있는데, 프러시아 장교한명이 당당히 줄을 새치기하고 표를 사갔다. 줄서있는 사람중 그누구도 그 장교를 제지하지 않았다... 또어느날엔가는 처남과 함께 경마장에 간적이 있었다. 경마를 관람하기위해 의자대용 박스를 가져다놓고 잠시 자리를 비웠더니 나와 처남의 박스위에 프러시아 장교와 그 아내가 당당히 앉아있었다. 나는 경마장관리에게 찾아가 얘기했지만 경마장 관리인은 어떻게 자기가 프러시아장교에게 항의할수있겠냐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내가 그장교에게 가서 내 외교관신분을 증명하고나서야 박스를 돌려받을수있었다."

자벤주민들이 자신에게 주는 모욕을 참을수 없었던 포스트너는 그대로 자벤주민들에게 되갚아 주었다. 그는 훈련도중 일부러 프랑스국기를 모독했고, 10월 28일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언했다.
"만약 우리 부대원중 Wacke(사각형 머리, 우리식으로 치면 식빵머리라는 의미로 알자스주민들을 비하하는 표현)들로 부터 공격당해 반격으로 때려눕혀버린다면 상으로 10마르크를 주겠다."
그는 덤으로 프랑스요원들이 독일병사들을 외인부대에 고용하려 한다며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을 주의하라는 말도 남겼다.
그런데 이 위험천만한 비하발언이 11월 6일, Elsässer Anzeiger와 Zaberner Anzeiger에 의해 보도되었고, 당장 알자스-로렌 지역주민들은 폰 포스트너 소위의 처벌을 주장하며 격양되기 시작했다. 결국 포스트너는 재판을 받아야 했고 그결과 가택연금 6일 형을 언도받았다. 그로부터 몇일뒤엔 신문에 이사실을 기고한 99연대 15중대 소속 병사 10명이 체포되었다. 포스트너에 대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불만은 가라앉을줄 몰랐다. 자벤에서는 연일 독일군과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고 폰 로이터는 자벤의 행정부 감독관인 말러(Mahler,)를 만나 시위를 억제 해줄것을 요구했지만, 그 자신이 자벤근교의 마을 출신인 말러는 " 평화를 사랑하고 법을 준수하는 시위군중들과 문제를 일으켜야 할 "이유가 없다며 거절했다.
그리고 11월 28일, 종래에 없던 대규모의 시위군중들이 99연대 막사앞에 몰려 들었다. 폰 로이터는 그날 당직 사관이었던 슈타트에게 시위군중해산을 명령했고, 슈타트는 무장한 병력을 출동시켜 시위군중을 해산시켰다. 무장한 병력들은 시위군중들을 시 광장과 길로 몰았고 그과정에서 26명이 체포했다. 그중에는 법정에서 나오던 자벤시 시의회의장과 두명의 판사, 한명의 변호사도 섞여있었다. 물론 이들은 곧바로 석방되긴했지만 시가지에 기관총이 배치되는등 대치상황은 계속되었고 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폰 로이터와 슈타트는 시위를 해산해서 사태를 진정시킬생각이었겠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시위진압은 독일전역에 퍼졌고, 군에 대한 대규모 반발을 불러왔다. 제국의회에서 SPD등 정당들은 군의 행동을 비판하는데 열을 올렸다. 폰 로이터는 독일 어느곳에서든 군 고위간부가 민간정부에 우선하는 권위를 가질수있다고 규정한 1820년에 제정된 법을 그들의 행동 근거로 들고 나왔고, 이후 진행된 재판에서도 이 법에 따른 적법한 행동임을 주장했다.
자벤에서 시작된 불씨가 프러시아의 군국주의에 대한 전체적인 저항으로 이어지려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군과 민간, 양측의 최고 권력자인 카이저는 퓰첸베르크에서 여우사냥을 즐기느라 이사태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벤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몇일동안 카이저는 자벤사태에 흥미가 없는지 침묵으로 일관하자, 황후가 만약의 경우 카이저를 태우고 베를린으로 돌아올 특급열차를 준비중이라는 소문이 더돌기로 했다.

사실 자벤사태가 악화되는 동안 카이저는 자벤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진 않았다. 알자스-로렌지역의 총독인 칼 폰 베델( Karl von Wedel)은 이미 퓰첸베르크의 카이저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했었다. 하지만 카이저는 군의 보고를 들을 때까지는 결정을 미룰생각이었다.


그리고 11월 30일, 카이저가 기다리던 전쟁장관 에리히폰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 알자스주둔군 사령관 베트홀드 다임링( Berthold Deimling )을 비롯한 군 고위간부들이 도착했다. 한편 자벤에서는 총독 칼 폰 베델과 주장관 조른 폰 블라흐가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퓰첸베르크에서 논의는 마지막에야 수상인 테오발트 폰 베스만 홀베크(Theobald von Bethmann Hollweg)가 합류한뒤 결론이 나왔다.-일부주장으론 그가 카이저가 베를린으로 돌아가기 몇시간전에 퓰첸베르크에 도착했다
카이저가 이사태에 대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보기엔 군이 도를 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다임링장군은 돌아가는데로 조사를 시작해 시위를 준동한 배후세력들을 색출해서 처벌하라. 그리고 알자스의 두 고위 민간 행정관(총독 칼 폰 베델과 주장관 조른 폰 블라흐)의 사표는 철회 하도록 한다."
다임링은 자벤으로 돌아온뒤, 계엄령을 해제하고 민간에 다시 권한을 이임했다. 자벤사태를 일단락 된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었다. 무개념 쏘가리의 전형 포스트너가 또다시 사고를 치고 만것이다!
12월 2일, 포스트너는 훈련을 위해 병력을 이끌고 시가지를 행군하고 있었다. 당연히 자벤시민들은 저 관심이 필요한 쏘가리에게 별로 좋지 못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절름발이 재화공을 포스트너에 삿대질하며 웃기 시작했고 이게 주변 사람들에게 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포스트너는 당연히 분노했고 행군도중 재화공에게 다가가 말싸움을 벌였다. 그러다 뭔가 참기 힘들었는지 군도를 빼들어 재화공의 머리를 치고 말았다.
지난 사건이야 사소한 말실수로 넘어가는게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군인 신분으로 비무장의 민간을 흉기로 공격한 도저히 빼도박도 못할사건이었다. 군사법정은 그에 징역 1년형을 언도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법정은 그의 행동을 정당 방위로 인정했다.
포스트너가 친 두번째 사고로 베를린의 라이히스탁의 의원들은 보다 강한 정치공세에 나서게 되었다. SPD.중앙당, 진보인민당등은 4일부터 6일까지, 이어지는 질의에서 홀베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때마침 집에서 별로 좋지 못한 일이 있었던 홀베크는 의원들의 공세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홀베크의 대응미흡따위는 비교도 할수없는 일이 이어서 벌어진것이다. 당시 팔켄하인의 증인자격으로 나와 증언했는데, 문제는 그의 발언이었다. 그는 의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도 명령조로.
"군 장교들은 언론인이나, 히스테릭한 특정인물이 아닌 그들의 그들의 의무에만 책임을 진다. 포스트너는 분명 수차례 처벌받은 젊은 장교이지만, 이런 젊은 장교야 말로 이 나라가 필요로 하는 인재다."
팔켄하인의 발언이 끝난뒤, 진보인민당은 홀베크가 국민의 대표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불신임안을 발의했다. 제국의회 성립이래 첫 불신임안이 발의된것이다.
이 불신임안에 대한 투표는 다음날, 이어졌다. 홀베크는 어떻게든 상황을 호전 시켜보려고 했고, 전날 보다 더 나은조건에서 더 나은 연설로 의원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물건너가 있는 판국이었다. 이날 이루어진 투표에서 불신임안은 찬성 293표, 무효 4표, 반대 54표로 가결되었다. 하지만 홀베크와 그의 내각은 불신임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불신임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카이저에게 있었는데 카이저는 불신임안을 거부했다. SPD는 못내 아쉬웠는지 수상의 활돌에 지원되는 예산을 크게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했으나 참여율이 저조했다. 찬성표를 던진것은 SPD와 폴란드당 뿐이었다.
자벤사태이후 문제의 핵심이었던 99연대는 자벤에서 철수했다. 시위과잉 진압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폰 로이터와 슈타트는 법정에서 "과잉진압은 인정되지만 그지경까지 되게 통제를 못한 민간경찰이 더 문제"라며 무죄판결을 받았다.
독일의회는 군인이 평시에 민간지역에서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1936년 나치가 이를 폐지할때까지 지속되었다.




덧글
rumic71 2008/12/13 21:35 # 답글
웬지 쇼와 초기 일본을 보는 듯합니다....
Cicero 2008/12/14 10:16 #
일본의 군국주의가 프러시아모델을 따라한거라고 하니 그럴수밖에요.
핌군 2008/12/13 23:52 # 답글
개념없는 쏘가리는 전 중대원을 고생시키고개념있는 소대장은 소대원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먼산)
Cicero 2008/12/14 10:36 #
군시절 개념있는 소위는 본기억이 없습니다...ㅜ_ㅜ죄다 중위는 되야 뭔가 제할일 하든데.
死海文書 2008/12/14 01:59 # 답글
아니 저런 사람도 있다니...
Cicero 2008/12/14 10:36 #
프러시아 군국주의가 낳은 괴상한 인간형이랄까요?
신광철 2008/12/14 02:19 # 답글
그날 반찬 투정만 안했어도...
Cicero 2008/12/14 10:37 #
도련님앞에선 반찬투정도 무의미.
다스베이더 2008/12/14 13:01 # 답글
그러게 비스마르크 말 좀 듣지...orz
Cicero 2008/12/14 18:49 #
말 잘 들었으면 오늘날 이지경까지 안왔겠죠.
LVP 2008/12/14 15:00 # 답글
이것이 바로 군바리들의 한계?
【天指花郞】 2008/12/14 15:54 # 답글
비스마르크가 10년만 더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솔솔 드는군요.근데 당시 알사스-로렌지방의 지명은 독일식이었나요, 프랑스식이었나요?
Cicero 2008/12/14 18:49 #
당시에는 독일식이었죠. 자벤(Zabern)이란 이름도 독일식이었고 오늘날엔 샤벤느(Saverne)로 불린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