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 봉기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에게 병합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언젠가 조국이 다시 독립할 날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독일과의 전쟁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당시 국제사회의 분위기탓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은 사실상 금기시 되었다. 하지만 1939년 9월, 결국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체코슬로비키아의 독립은 논의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1940년,구 체 코슬로바키아의 외무상이던 에드발트 베네스를 대통령으로 하는 체코슬로바키아 임시 정부가 런던에 수립, 대독선전포고를 하고 2차대전에 참전한다.
<에드발트 베네스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 망명정부 대통령>

2차대전에 참전한 이후, 에드발트를 비롯한 체코망명정부는 망국의 임시정부라면 누구나 꿈꾸는 "국내의 자생적 봉기에 의한 독립"을 어떻게든 실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점에 있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다른 추축국점령국보다 유리했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삼기면서 슬로바키아괴뢰국을 수립했고, 이 슬로바키아의 군대내부에는 사실상 독일괴뢰국인 현실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1943년, 에드발트는 이들과 다른 무장단체와 접선을 시도, 이들에게 무장 봉기를 호소했다. 에드발트의 이러한 호소는 슬로바키아내부의 세력들에게 호응을 얻었고,그해 크리스마스에 슬로바키아에 잔류해 대독일 투쟁을 지속하던 공산주의, 민족주의,군내부세력들의 결집인 슬로바키아국민회의를 결성, 대독일독립투쟁을 위한 연대, 에드발트의 런던망명정부의 권위인정, 그리고 종전후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의 재건이 결의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국내군의 얀 골리안장군. 봉기라는 상황덕에 중령에서 장군으로 고속승진했다>

이어 1944년 3월27일, 슬로바키아군의 얀 골리안 중령이 무장봉기 준비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얀은 자금과 무기와 탄약, 자금과 기타 물자들을 곧 있을 봉기를 위해 슬로바키아 중부와 동부의 군사기지들에 비축했다. 봉기의 주축이 되는 것은 슬로바키아국내군으로 불리는 약 3200명의 슬로바키아정규군병력과 기타 파르티잔그룹들이었다. 그러나 이들만으로 봉기를 성공시킬순 없었다. 봉기를 성공시키기위해선 외부의 협력이 필요했다. 에드발트는 연합군사령부와 모스크바를 오가며 지원을 약속받았다. 

1944년 여름이 되자, 독일의 동부전선은 슬로바키아근교까지 후퇴하기 시작했다. 6월 바그라티온작전을 개시한 소련군은 8월엔 슬로바키아동북쪽 국경에서 불과 40Km떨어진 크로스노에 도착했다.

슬로바키아까지 잃을순 없다! 바바롯사작전이전의 세력권은 물론 이젠 1939년 이전의 세력권까지 상실하게 된 독일군은 슬로바키아방어전을 준비했다. 독일군의 방위전략에 따라 슬로바키아군 2개 사단과 비행대가 슬로바키아북동쪽에 자리한 프레소프에 배치되어있었다. 이들은 잘무장되고 훈련되어있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국내군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다. 이들은 봉기가 시작되면 독일군의 등을 칠 계획이었다.

두 사단을 통솔하고 있던 빌리암 탈스키대령에게는 두가지 봉기 계획이 있었다.

하나는 코네프의 우크라이나 방면군의 도착에 맞춰, 이들이 통과할 통로린 두클라 패스(폴란드와 슬로바키아를 관통하는 카르파디아산맥의 산길)를 장악하던가

혹은 코네프가 도착하기 직전에 먼저 봉기를 시작해, 두클라 패스를 장악, 독일군과 싸우다 소련군의 도착을 기다린다였다.

골리안은 두번째 전략을 지지했고 탈스키는 봉기의 지도자인 그의 의지를 받아 들여 두번째 전략을 채택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루마니아가 추축국을 이탈, 연합군에 합류해버린것이다! 독일은 순식간에 완충지대를 상실했다. 독일은 슬로바키아에서의 방어전 준비를 더욱 강화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1944년 8월 28일, 독일은 슬로바키아를 '점령'했다. 

다음날 오후 7시, 슬로바키아국방장관 페르디난트 카틀로스는 슬로바키아가 독일에게 점령되었음을 라디오방송을 통해 알렸다. 체코슬로바키아국내군은 당황했다. 루마니아의 추축국이탈과 독일의 슬로바키아점령, 그어느것도 그들의 예정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들 이었다. 얀은 즉시 모든 국내군부대들에게 오후 8시를 기해 봉기하라는 암호 메세지를 보냈다. 그러나 급작스럽게 압당겨진 봉기가 제대로 진행될리는 없었다.많은 부대들이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우왕좌왕할수밖에 없었다.

봉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두클라 패스장악을 담당했던 탈스키 대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준비되지 않은 병력으로는 봉기가 성공할수없다고 판단, 다음날인 30일, 잘무장된 2개사단을 버리고 비행대와 함께 소련점령하의 폴란드로 날랐다.

지휘관이 도망간 2개사단은 혼돈에 빠졌고, 저항조차 하지 못한체  30일 오후 독일군에게 모두 무장해제당한뒤 독일본토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탈출해 파르티잔이나 국내군에 합류하기도 했고 또 일부는 집에 돌아갔다.

봉기는 그 첫시작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첫시작부터 핀트가 어긋나긴 했지만 골리안은 봉기를 계속 진행했다. 골리안과 체코국내군은 슬로바키아 중앙에 위치한 반스카 비스트리카에 사령부를 마련했다.  전투 한번 없이 두개사단말아먹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비관적인것만은 아니었다. 봉기를 시작했을때, 약 18000명에 불과했던 병력이 9월이 되자, 이곳저곳에서 합류한 병력으로 47000여명으로 불어났으며, 이를 바탕으로 슬로바키아의 중동부에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여기서 두개의 비행장을 장악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골리안은 중령에서 장군으로 진급했다.

슬로바키아인들뿐만 아니라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프랑스군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국내군에 합류해왔다. 당초 소련의 지시에만 따르던 파르티잔들도 유연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고 연합군의 지원도 시작됬다. 게릴라전과 연합군과의 연락 유지를 위해 SOE와 OSS의 요원들이 도착했으며10월 30일에는  미군이 B17도 보내왔다. 소련도 보급품을 공수하기 시작했다.

국내군에게 있어서 연합군의 지원, 특히 공군력 지원은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국내군은 봉기의 핵심이던 2개사단과 1개 비행대를 그냥 날려먹었으니 말이다. 공군력의 빈자리를 구식복엽기로 매워야 했던 그들에게 이런 지원은 가뭄뒤에 단비나 마찬가지였다.-여담이지만 같은 시기 유고의 파르티잔들은 스핏파이어와 수투카를 굴리고 살았다.
<체코슬로바키아 국내군의 아비아B534, 봉기당시에 국내군ㅇ에 투입되어 JU52 1기를 격추했다.>

물론 상황이 생각보다 좋아졌다고 해서 골리안은 결코 상황을 낙관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때, 우리는 독일군이 반격을 시작하면 잘해야 2주를 버틸수있다. 그때까지 소련이 두클라 패스를 통과해 오길 바랄뿐이다."

두클라 패스 전투

봉기가 일어나자, 독일은 브라티슬라바에 있는 조세프 티소의 괴뢰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고틀로브 베르거 상급대장이 이끄는 4만명의 친위대을 파견했다. 베르거는 우선 두클라 패스부터 정리했다. 그곳에서 그는 봉기군에 가담할 예정이었던 2개사단을 무장해제시키고 소련군을 위해 두클라 패스를 장악하려 했던 파르티잔들을 소탕했다.
<上-슬로바키아의 지도자, 조세트 티조-티토와는 무관한 인물이다.
下-티조의 얼굴을뜬 슬로바키아 건국5주년 기념주화.얄궂게도 건국 5주년에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독일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에드발트는 소련에게 약속했던 지원을 보내라고 촉구했고, 소련은 그해 8월초부터 시작된 바르샤바봉기에서 그들이 취한 태도에 대한 비난을 의식해서였는지 -혹은 코네프의 우크라이나방면군이 주코프에 비해 여유가 있었던지-비교적 그약속에 충실했다. 소련 항공기들은 국내군점령하의 해방구에 지원물자를 뿌렸다. 그러나 이러한 물자의 선점을 두고 국내군과 파르티잔은 항상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은 코네프의 후원과 지시를 받는 파르티잔쪽에게 물자가 집중되기 일수였다. 그리고 이덕분에 파르티잔보다 전투력이 높다고 평가받은 국내군의 약체화를 불렀다.

코네프는 물자적 지원외에도 실질적인 군사행동으로 슬로바키아봉기를 지원하기위해 나섰다. 1944년 9월 8일, 마침내 우크라이나방면군이 두클라 패스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점을 주코프가 바르샤바 봉기때 보였던 태도와 비교하여 코네프를 주코프보다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이반 코네프원수, 우크라이나 방면군 사령관. 터럭 하나없는 머리가 매력적이다.>

코네프는5일안에 두클라 패스의 요충지인 프레소프를 장악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작전을 개시했다. 국내군도 이에 호응해 두클라 패스 장악에 들어갔다. 예정보다 11일이 지났지만 봉기계획대로 움직인것이다. 소련군의 진격은 초기몇일동안은 순조로웠다. 비록 초반에 폴란드 영내의 크로스노장악에 시간 좀 잡아먹어서 5일안에 프레소프장악은 빠듯하고 무리로 보였지만, 어쨋든 '근시일내에 소련이 두클라 패스를 장악하고 슬로바키아를 해방시킬것이다.'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낙관론을 처절하게 부셔버릴 접전은 얼마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독일군은 브로산카와 마츠노브카마을이 자리한 534고지를 요새화하고 국내군과 소련군을 상대로 접전을 벌였다. 9월 10일부터 20일까지 전개된 이 전투는 무려 20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뀔만큼 치열했고 5일안에 프레소프장악이라는 코네프의 전략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결국 우크라이나 방면군이 두클라 패스를 빠져나온건 10월 6일이 되서였다.
<두클라 패스전투 기념관의 조형물>

코네프가 카르파디아 산맥에서 이렇게 애를 먹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 에드발트는 내부분열을 겪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국민회의를 재통합시키기위해 무단히 애를 쓰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기존의 국내군사령관 얀 골리안으로는 이들을 통솔할수 없다고 생각되었고, 루돌프 비스트 장군을 국내군사령관에 임명, 파견하고 골리안에게 부사령관을 맏게 했다. 이에 따라 10월 7일, 비스트장군이 국내군 사령관에 취임했지만 봉기세력들간의 내분은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9월 17일, 두대의 B17을 타고 OSS의 제임스 홀트 그린중위가, 다음날 SOE의 존 쉠머소령이 국내군이 장악한 해방구를 방문했다. 그들은 연합군최고사령부에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해결할 길 없는 분열과는 별개로 국내군은 10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 제 1군으로 재명명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한다는 대외적 선전이었다.

독일군의 반격

코네프가 534고지를 두고 골머리를 썩고 있던 9월 19일, 베르거 상급대장은 4개의 친위대 사단과 4개의 국방군사단, 그리고 1개의 슬로비카이괴뢰정부군을 포함하는 48000명의 병력을 이끄는 봉기진압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베르거는 쉽사리 군대를 움직이지 못했다. 봉기군은 6만명의 국내군과 18000명이라는 숫적우위를 확보하고 있었고, 봉기세력 뿐만 아니라 두클라패스를 타고 내려오는 소련군도 막아야 할 대상이었다.
<친위대 상급대장 고틀로브 베르거, 그는 훗날 포로들에 대한 가혹행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0월 17일부터 18일, 독일은 헝가리주둔 독일군 35000명을 슬로바키아로 재배치 시켰다. 호르티의 이탈을 막기위해서 부다페스트에 배치했던 이들이 호르티가 실각하고 괴뢰정권이 들어사자, 슬로바키아에 재배치된것이다. 10월이 지나기도 전에 이번엔 부다페스트근교에 붉은 군대가 모습을 드러낸걸 생각하면 제대로 오판한 샘이다. 하지만 어쩌라? 독일은 이미 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여유있는 병력운용이란 사치에 불과했다. 우선 급한 불부터 끄기 위해 이쪽 저쪽 끌려다니는 독일군. 그게 전쟁말기 독일군의 모습이었다.

병력이 증원된것과 함께 베르거에게는 또하나의 행운이 있었다. 스탈린이 체코슬로바키아보다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폴란드에 더 많은 관심을 둔것이다. 우크라이나 방면군의 적잖은 손실, 스탈린의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낮은 관심, 그리고 병력증파 베르거는 이제 수세에서 공세를 전환할 틈을 얻은 것이다.

10월 말, 베르거는 6개의 독일군사단과 1개의 슬로바키아군사단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다. 내분을 겪고 있던 봉기세력들은 손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 붕괴되기 시작했다. 10월 27일, 비스트와 봉기세력사령부는 그들의 본거지인 반스카 비스트리카에서 후퇴해야만 했다.10월 28일, 비스트는 런던 망명정부에 봉기가 실패했음을 알렸다. 이제 그들은 정규전을 포기하고 게릴라전에 전념해야 했다. 10월 30일, 슬로바키아의 괴뢰정부수장인 티소는 봉기를 진압한 독일군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훈장을 수여했다.

그후

체코슬로바키아봉기세력은 봉기실패후에도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독일은 파르티잔들에게 용서없었고, 아인자츠그루펜이 그 음침하고 소름끼치는 모습을 슬로바키아에서 드러냈다. 그들은 파르티잔에 협력했다고 판단되는 마을 93개를 불태웠고 수많은 인명을 학살했다. 오늘날 슬로바키아정부는 지금까지 211개의 학살무덤을 발견했으며 5304명의 유해를 발굴했으며 한망을에서 900명 가량 죽은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독일은 봉기에 대한 보복으로 93개의 리디체를 만든것이다.

11월 3일, 봉기의 지도자인 골리안과 비스트가 포론스키 브코벡 마을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심문받은뒤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 마지막으로 남아 구조요청을 보내던 SOE와 OSS대원들 독일군에게 체포되었다.

"연합군 코만도들은 그들이 무슨 옷을 입고 있던, 무슨임무를 띄고 있던, 혹은 그들이 항복을 했건 저항을 했건 포로로 잡지 마라!"

독일군은 그들의 총통이 내린 코만도오더를 충실히 따랐고 그에 따라 그곳에서 몇명에 대한 즉결처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살아남은 요원들은 집단수용소에 보내져 그곳에서 죽었다. 미군이 보냈던 B17도 대부분이 격추당했고, 살아돌아간 연합군병사들은 5명의 프랑스인 파르티잔뿐이라고 한다.

살아남은 저항세력의 게릴라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독일군의 압제와 93개의 리디체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해 프라하에서 다시 봉기가 일어났을때 그것은 독일과 독일계주민에 대한 잔인한 보복으로 돌아왔다. 이때 살해된 독일계주민은 약 5만명(2:0씨의 책에서는 30만이라는 주장이 나온다.)정도로 추산된다.
<독일군의 만행은 프라하봉기때 독일계주민에대한 보복으로 돌아왔다.>

코네프의 우크라이나 방면군은 두클라 패스를 통과하고도 그곳을 장악하기위해 전투를 지속했다. 소련군과 독일군은 도브라슬라바라는 마을에서 대규모접전을 벌였는데, 혹자는 이것을 제2의 쿠르스크라고 부를만큼 대규모의 치열한 접전이었다.우크라이나 방면군은 11월 25일에 두크라패스에서 마지막 독일군진지를 점령했다. 슬로바키아는 3월 4일에야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낼수있었다. 이어 체코는 5월 프라하봉기와 소련군의 도착으로 해방되었다.

슬로바키아의 괴뢰정부지도자인 조세프 티조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슬로바키아봉기에 대한 반역과 나치즘에 대한 협조가 혐의가 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집단수용소로 보내진 슬로바키아병사들을 살리기위해 노력했으며 독일군에게 협력함으로서 더이상의 파괴를 막을수있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사형이 언도되어 1947년 3월 1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에드발트는 이후, 소련을 믿지 않았다. 1945년 프라하봉기 당시 미군이 소련군보다 프라하에 가까이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쳤으니... 그는 해방이후 돌아와 체코슬로바키아대통령이 되었지만, 1948년 6월, 클레멘트 고트발트수상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같은해 11월 3일, 사망했다. 그는 자택 정원에 묻혔다.

여담이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이 독일에게 가졌던 악감정은 상상이상이었던 것 같다. 에드발트의 망명정부시절 발효된 대통령포고령에 의하면 체코슬로바키아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에 대한 재산몰수와 추방을 합법화시켜주고 있는데, 이게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고 한다.

<


<반스카 비스트리카에 있는 슬로바키아봉기기념관의 조형물>

by Cicero | 2008/06/25 12:35 | side of history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flager8.egloos.com/tb/181498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LVP at 2008/06/25 13:42
히틀러가 '체코는 독일을 향한 흉도(凶刀)'라면서 입에 소다거품으로 물은 이후로 꼬이기 시작...끝나니 나중에 소련이 땡깡을 부렸으니...그나저나 에드발트가 얼마나 쎄면(?) 그가 내린 포고령이 아직도 유효한거야;;?? (옆집과는 달리 독일은 이제 풀어줄 때도 됬는데;;;???)
Commented by Cicero at 2008/07/05 13:18
포고령자체가 아직도 유효한게 당시 압류했던 독일인재산들 돌려달라고 요구당할까봐 그렇다더군.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