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부다페스트(Budapast)

1943년 이후, 독일의 패배가 점점 확실시 되자 독일의 동맹국들은 썩은고목 밑에서 도망치듯, 하나 둘씩 독일을 떠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움직인건 이탈리아였다. 그들은 시실시에서 연합군이 승리하고 본토에 상륙하자 무솔리니를 축출하고 연합군에 전향했다. 이어 루마니아에서도 미하일국왕이 친독 내각을 이끌던 안토네스쿠를 축출시켰고, 얼마지나지 않아 소련군과 함께 독일을 공격했다. 이런 움직임속에서 헝가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4년 10월, 헝가리왕국의 섭정, 미클로스 호르티(Miklós Nagybányai Horthy) 역시 붕괴하고 있는 독일을 떠나, 소련과의 단독강화를 맺으려했다. 루마니아가 안토네스쿠를 축출하고 연합군에 가담한탓에 헝가리는 전선과의 완충지대가 사라졌기때문이었다. 이들에게 소련군의 스팀롤러가 다가오는건 더이상 멀리있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 가 아니었다.호르티는 밀사를 보내 몰로도프와 휴전에 관한 협상을 추진했다.
<미클로스 호르티, 헝가리왕국의 섭정.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몰락이후 혼란기의 통치자로서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2차대전이라는 대혼돈은 그가 쉽게 감당할수있는게 아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호르티의 이런 움직임은 히틀러의 정보망에 감지되었고, 히틀러는 이 발칙한 동맹국의 반역행위를 막기위해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오토 스코르체니를 부다페스트로 보냈다. 헝가리와 소련의 강화조약을 가로 막기위한 작전, 미키마우스작전의 시작이었다.
<연합군이 인정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 오토 스코르체니. 그가 평범한 엔지니어출신이란점이 더욱 무섭다.>

1944년 10월, 라디오방송을 통해 소련과의 평화협상의지를 밝혔다. 스코르체니는 이 반역에 재빨리 대응했다. 그는 즉각 친위대전차사단을 동원해 부다페스트 시가지를 포위했다. 스코르체니의 발빠른 대응으로 다수의 헝가리군이 항복했다. 스코르체니는 그렇게 호르티를 부다 성에 몰아넣고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부다 성, 호르티가 고립되서 저항한 성으로 1945년 2월16일, 소련군이 최종적으로 이곳에 붉은 기를 꼽으면서 부다페스트전투는 끝났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헝가리는 아직까지 독일의 동맹국이었기때문에 호르티를 잡기위해 교전이라도 벌이게된다면 헝가리인들의 민심만 이반될것이 뻔했다. 결국 스코르체니는 포위가 성공한 시점에서 어떤 또다른 군사적 행동을 취하기보단 부다페스트시가지에서 양국의 굳건한 동맹을 과시하는 군사 퍼레이드를 펼치는것으로 만족해야헸다.
<부다페스트에 배치된 독일군들>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헝가리의 파시스트당인 화살십자당은 호르티정권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고, 10월 12일, 독일은 이들을 후원하기위해 병력을 증원했다. 10월 14일에는 도살자 폰 뎀 바흐가 42대의 티거를 몰고 스코르체니를 돕기위해 바르샤바에서 부다페스트로 왔다.
<도살자로 불리는 폰 뎀 바흐>

부다페스트에 있는 모든 헝가리군은 호르티의 통제밖에 있었다. 헝가리군 1군과 2군사령관은 부다페스트에 있는 모든 헝가리군에게 교전을 중단할것을 라디오방송으로 명령했다. 호르티가 운용가능했던 병력은 부다성을 방어하는 소수의 헝가리군뿐이었다.

1944년 10월 15일, 호리티는 헝가리에 대한 독일의 총 책임자, 에드문트 비센마이어와의 협상에 나섰다. 그사이 그의 아들, 미클로스 호르티 주니어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를 통해 소련과 협상하기위해 성을 나서다. 오토 스코르체니에게 납치되어 카펫에 둘둘말려 공항을 보내졌다. 스코르체니나 그에게 명령을 내린 나치스상층부입장에서는 이게 호르티를 협박할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이소식은 오히려 호르티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납치소식이 호르티와 비센마이어의 회담도중 전해지자, 호르티는 분노해서 비센마이어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오후 1시 15분, 라디오를 통해소련군과의 교전중지명령을 내렸다. 독일군이 완전 장악한 부다페스트는 몰라도 소련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있는 국경지대에는 혼란이 찾아왔다. 몇몇 장군들은 실제로 소련군에게 투항해 버렸다.

헝가리 수상 라카토스는 헝가리가 다시 소련과 싸우는 대신 잡혀간 호르티의 아들과 바카이장군을 풀어주고, 호르티에 대한 포위도 풀어줄것을 부탁했다. 비센마이어는 이것을 거절했고, 호르티는 부다성으로 올라오는 언덕길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지뢰를 깔았다.

1940년 10월 16일, 마침내 스코르체니가 이끄는 독일군(무솔리니 구출과 호르티아들납치에 동원된 스코르체니의 정예병들)이 독일군최고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부다성으로 처들어갔다. 호르티는 한줌도 안되는 방위벙력으로 저항했고 3명의 독일군과 헝가리군이 죽은뒤에야 호르티는 항복했다. 이후 구금된 호르티는 두개의 명령서,-1.교전중지명령의 취소,2.화살십자당의 스잘라시에게 직위를 넘긴다.-에 싸인한뒤 독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아들과 재회할수있었다.

<
<上-화살십자당기, 어째 스바스티카 짝퉁티가 너무 난다. 下-스잘라시, 이친구는 집권타이밍이 너무 안좋았고 그덕분에 종전후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호르티가 나름 천수를 누린걸 생각하면...>

독일은 새로 구성된 헝가리정부에게 오스트리아국경지대를 요새화하는데 필요한 5만명의 유대인노동자를 요구했다. 그러나 스잘라시정권은 헝가리인 감시자를 포함한 25000명을 보내는것으로도 벅찼다. 헝가리는 호르티정권때보다 더 많이 독일에게 뜯겼다. 헝가리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스잘라시가 아닌 독일인 비센마이어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지역의 홀로코스트에 실질적 책임자인 비센마이어. 종전후 20년형을 언도받았으나 1951년감형되어 풀려났다.>
1944년 10월 말, 마침내 붉은 군대가 부다 페스트동쪽 변두리에 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잘리시는 12월 4일, 독일로가서 히틀러에게 부다페스트를 무방비도시로 놔둘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히틀러에겐 얄짤 없었다. 히틀러는 부다페스트가 최후까지 저항하길 원했다. 훗날 베를린이 그랬던것처럼. 마지막까지 "최후순간의 결정적승리"에 대한 확신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망하는 마당에 혼자 망할수없다는 오기였을까?

스잘라시는 다행히도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헝가리인들이 독일로 도피할수있도록 허가받았다. 이에 따라 100만명의 헝가리인들이 국경을 넘어 독일로 향했다. 마침내 194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서유럽 아르덴에서 독일군의 마지막발악이 진행되는 동안, 부다 페스트는 붉은 물결에 완전히 둘러 쌓였다. 1944년의 마지막날, 7만의 독일군과 헝가리군은 이 절망적인 포위를 돌파하기위해 공세를 펼쳤지만 붉은 벽을 뚫진 못했고 1945년 2월 16일. 부다페스트는 소련군에게 점령, 혹은 해방되었다.

<부다페스트에 공세를 퍼붇는 붉은 군대>

이전투로 붉은 군대는 80,026명이 죽고 240,056이 부상당했으며, 추축국은  40,000 명이 죽고 62,000명이 부상당했다.  
 
<부다페스트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956년 바르샤바조약군에게 유린당한 부다페스트>

by Cicero | 2008/05/23 18:03 | side of history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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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VP at 2008/05/23 21:56
그러게 외세에 의존하여 기득귄 챙겨멱으려드는 짝퉁이 나라를 말아먹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
(깃발부터가 벌써...)

※그나저나 소련군은 왜 사상자 스코어가 거의 추축국에 비해 '따블'인건지 원...;;;;
Commented by Cicero at 2008/05/25 19:05
더블 스코어는 2차대전 내내 붉은 군대의 빛나는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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