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아프리카군단의 전설의 시작-포어벡

불패의 독일 아프리카군단의 사령관,
보급이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도 아군보다 몇배나 많은 연합군을 상대로 싸워 이긴 기동전의 명수.
이 얘기를 들으면 우선은 누가 생각날까? 아마 적지 않은 이들이 사막의 여우, 롬멜을 떠올리겠지만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인물은 그가 아니다.


<롬빠들에겐 미안하지만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이양반이 아니다.>

롬멜이 아프리카에서 굴러먹기 무려 20여년전, 그가 활약했던 북아프리카사막에서 훨씬 남쪽인 중부아프리카에서 독일아프리카군단의 신화를 만들어낸 명장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번에 소개할 파울 에밀 폰 레토프 포어벡(Paul Emil von Lettow-Vorbeck)이다.


<파울 에밀 폰 레토프 포어벡(Paul Emil von Lettow-Vorbeck), 이사람이 바로 독일 아프리카군단의 신화의 시작이었다.>

그의 아프리카군단 전설은 1914년에 시작된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아프리카중부에 있던 영국과 독일의 식민지주민들은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불과 어제까지만해도 평화롭게 교류하던 그들이, 그들의 모국들이 서로 선전포고하면서 적으로 돌아서 버린것이다.당시 아프리카식민거주민들은 이것이 결코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천Km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럽의 전쟁'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영국과 독일 정부도 굳이 식민지까지 전선을 확대해 유럽에 집중해도 모자랄 역량을 소모하고 싶진 않았다. 아프리카의 독일총독 하인리히박사도 그런생각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중부 아프리카는 식민모국들이 피터지게 싸우든 말든 조용히 지낼수있을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아프리카만의 평화'에 동의하지 않았다. 중국의 의화단봉기와 아프리카거주민들의 봉기를 진압하며 군경력을 싸워온 포어벡대령은 아프리카의 영국식민지를 공격할 생각을 세웠다. 그에게는 뚜렸한 목적이 있었다. 아프리카의 연합군을 공격함으로서 유럽전선에서의 연합군의 역량을 아프리카로 돌려서 독일의 승리를 이끌어낸다는 것이었다. 그는 하인리히가 항복이나 평화협정따위를 영국식민지당국과 맺기전에 200여명의 백인장교와 2500명의 아스카리(현지 부족민)병사를 이끌고 영국식민지역으로 공격을 감행했다.그들은 아주 소량의 물자와 탄약만을 지니고 있었다.(일부자료에서는 포어벡이 하인리히를 '납치'했다는 주장도 있다.)

<포어벡과 하인리히, 두사람은 사고구조가 틀렸고 서로 이해하지 못했다.>

포어벡이 공격을 감행한 개전 초기 2년동안 케냐에선 20대의 기관차들과 수마일의 철도가 파괴되었다. 영국군은 포어벡의 군대에게 확실한 병력적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어벡의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영국은 포어벡이 예상한대로 반응했다. 영국언론들은 야만스러운 '독일인들과 그들의 식인종병사들'에게 유린당하는 '아프리카속의 유럽'에 대해 보도했고, 국민여론은 아프리카로의 파병을 외쳐댔다. 결국 영국정부는 아프리카로의 파병을 결정했다.

탕가전투

1914년 11월, 영국은 인도주둔군을 동원해 영국령 케냐에서 80Km떨어진 탕가에 침공을 감행했다. 영국군은 순양함 폭스를 동원한 무력시위로 펼쳤다. 영국군 사령관 아서 아티켄은 전함을 통한 무력시위만으로 독일인들을 굴복시킬수있다고 믿었고, 포어벡은 그사이에 1개중대병력만이 주둔해있던 탕가에 병력을 보강해 1000명의 방위병력을 확보했다. 결국 탕가거주 독일인들과 영국군과의 평화협성은 결렬되었다. 

아티켄은 포어벡이 이미 도시방어에 필요한 충분한 자원을 확보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항구에 수뢰가 매설되어있다고 판단했고, 탕가에서 남쪽으로 3마일 떨어진곳에 상륙했다. 아티켄은 휘하병력을 동원해 정찰에 나섰지만 오히려 매복해있던 독일군에게 격퇴당했다.

다음날 아침, 아티켄은 탕가 시내로 진입을 시도했다. 아티켄 휘하의 병력은 8천명, 포어벡에 비해 8대1이라는 압도적인 병력비를 자랑했다. 아티켄이 승리를 자신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군은 시내에 진입하자 마자 곳곳에 매복해 있던 독일군의 기습을 받았다. 오전의 시가전은 영국군이 시외곽으로 쫒겨남에따라 정글전으로 변했다. 전투에 동원된 인도인들은 독일군의 아스카리병사들은 마치 '성난 벌떼들 처럼' 곳곳에서 달려들었다고 회고했다. 덕분에 탕가전투는 '벌들의 전투'라는 별칭이 붙게되었다.


포어벡은 그날 저녁, 그대로 반격을 계속했고, 상륙했던 영국군들은 말그대로 배로 "쫒겨났고", 곧이어 배위에서는 백기가 올라왔다. 이전투로 포어벡은 다량의 물자를 노획했다. 소총과 기관총, 그리고 60만발의 탄약등을 말이다. 영국군 857명, 독일군148명의 인명피해를 남긴체, 탕가전투는 종결되었다. 포어벡은 패자에게 관대했다. 그는 직접 브랜디를 들고 아티켄을 직접방문해, 서로의 전술에 대해 토론했고, 의무병들에게 영국군부상자도 치료하도록 명령했다.

포어벡의 활약

탕가전투 이후, 영국은 포어벡을 패배시키기위해 병력증원했다. 전쟁기간동안 영국이 동원한 병력은 총 10만명정도 되는데, 포어벡이 병력이 가장 많을때 12000명정도였으니 영국이 동아프리카에서 얼마나 발이 묵였을지는 알만도 하다. 영국군이 압도적인 병력과 물자를 동원한 반면, 포어벡은 만성적인 병력과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그가 전쟁기간에 제대로 받은 보급은 1916년 3월 16일, 리디남쪽지역에서 1500톤의 보급물자를 받은것 뿐이었다. 그는 1915년 침몰한, 순양함 쾨니히스버그의 105mm포와 그 승무원들도 병력에 편입시켰다.

<기구한 운명의 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 침몰한것도 모잘라 승무원들은 보병이 되고, 함포는 야포가 되었다. 훗날 대서양방벽의 해안포로 전용된 함포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르겠다.>

영국은 포어벡의 게릴라전에 노이로제가 걸릴지경이었다. 아프리카정글한가운데서 설치는 이 독일인은 영국으로 하여금 아프리카에서 발을 빼지못하게 만드는 성가신 늪이었다. 그냥 무시하고 유럽전선에 매진하는것이 최선책이었겠지만, 그러기엔 대영제국의 자존심과 승리를 갈망하는 여론을 무시할수없었다.

포어벡의 승리가 가능했던것은 그가 현지부족민인 아스카리족으로 구성된 부대의 충성심을 이끌어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언제나 병사들과 함께 했다. 함께 먹고, 함께 잤으며, 함께 걸었다. 백인우월주의가 팽배한 아프리카에서 포어벡의 행동은 흑인병사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백인사회에 널리 퍼져있던 편견-흑인은 뭘해도 백인을 이길수없다는 편견에 기초해, 영국군이 아스카리병사들을 평가절하했던것도 큰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또한가지 그의 승리가 가능했던 점이 있다면 그의 부대가 고기동성의 이동수단을 갖췄다는 점을 들수있을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전거였다. 동부아프리카에서 자전거는 어느정도의 화물을 운반하고 빠른속도로 이동하기에 꽤나 적합한 물건이었다.  

<포어벡은 흑인병사들을 생전 본적도 없는 카이저를 위해 싸우다 죽을수있게 만들었다.>

포어벡은 이 충성심강한 병사들과 높은 기동력으로 영국식민지역의 교통설비와 통신설비를 파괴했다. 영국군들이 그들을 잡기위해 도착했을때는 이미 불타고 남은 폐허만이 존재했다. 그는 미 동부13개주면적을 오직 원시적인 교통수단만으로 유린하고 다닌것이다.

스머츠의 등장

포어벡때문에 골치를 썩던 영국은 포어벡을 잡기위해 제2차 보어전쟁에 참전했던스머츠장군을 동아프리카로 파견한다. 스머츠는 1916년 3월, 포어벡을 잡기위해, 45000의 병력을 동원해 대규모반격작전을 개시한다.   그리고 1917년 10월, 양측의 병력은 마히와에서 대규모 접전을 치룬다. 영국은 압도적인 병력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270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는등 큰인명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스머츠는 당황화지 않았다. 독일도 519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는데, 영국측은 감내할수있는 수준의 피해인데 반해, 무엇이든 모잘랐던 독일측에게는 치명타였기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인것은 이제 포어벡이 '돌아갈곳'이 사라지고 있었다.연합군은 아프리카의 독일식민지를 차근차근 점령하고 있었다.

<영국은 포어벡을 잡기위해, 스머츠(Jan Christiaan Smuts)를 동아프리카로 파견한다.>


마히와전투의 승전보가 독일로 알려지자, 카이저는 포어벡을 소장으로 진급시켰다. 그러나 그는 통신이 두절된 아프리카에서 이소식을 듣지못했고 전쟁이 끝난뒤에야 알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약탈자? 혹은 전장의 신사?

앞서 탕가전투에서 언급되었듯히, 포어벡은 패자에게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적 부상자들을 치료해주기도 했고, 잡힌 포로들을 존중해주었으며, 포로들을 풀어주었다.-포로들을 풀어준것은 인도적인 이유보다는 포로들때문에 인력이나 물자가 낭비되는것을 막기위해서였다는 점이 더 크지만.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런 주장이 있다. 그가 포로들에게는 신사적으로 대했을지 모르지만. 동시에 잔인한 약탈자였다고. 이주장에 따르면 포어벡은 만성적인 병력과 물자부족에 시달렸던 까닭에 병사들의 사기유지와 보급물자 충당이 항상필요했다.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진작과 보급물자충당을 위해서 병사들의 약탈과 강간을 허용했다. 사실 이주장도 어느정도의 신빙성이 있는지는 확신 할수 없다.-요새 위키에서 하는 말은 절반밖에 못믿겠다. 어쩌면 포어벡을 폄하하기위한 연합군쪽의 기록일수도 있다.

다만 독일령아프리카가 연합군에게 완전히 점령당하면서 그나마 간간히 이어지는 보급이 완전히 차단당했을때, 포어벡의 병사들이 약탈자로 전락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그리고 확실한건, 그가 전쟁기간동안 파괴한 기간산업망으로 인해, 1919년 아프리카를 덮친 독감에 빠르고 적절한 대응을 하기 힘들었고, 그로인한 참극에서 포어벡은 책임을 피할수 없다는 사실이다.

종전, 그리고 그 이후

마히와전투이후, 포어벡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그는 보급물자를 충당하고 독일령아프리카로 돌아가기위해, 포루투칼령 아프리카를 기습하기도했고, 그에 대한 설욕전을 준비했던 포루투칼군과 영국군을 함께 격파하기도했다. 마침내 그가 독일령 아프리카로 돌아가기위해, 국경지대에 도착했을때, 연합군이 백기를 들고 찾아와, 그에게 전쟁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날 1918년 11월 14일, 포어벡은 교전중지명령을 내리고, 영국령 아프리카에서 종전협정을 체결했다. 그가 교전중지명령을 내렸던 참베시강변에는 포어벡기념관이 세워져있다.

종전후 1919년, 그는 자신의 부하 120명을 이끌고 귀국했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브란덴부르크에서 승전퍼레이드를 가졌다. 그는 1차대전동안 단한번도 패하지 않고 종전때까지 패하지 않은 영웅으로 숭배되었다. 그의 무용담덕에 독일인들은 동부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언젠가 자신들의 주인인 독일인들이 돌아와줄것이라고 믿는 역겨운 환상마저 가지게 되었다.

나치스는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포어벡은 나치스의 유용한 프로파간다가 되었다.
독일민족이 패배하지 않았다는것을 증명해주는 영웅!
그는 익숙치 않은 환경속에서 압도적인 적앞에 굴하지 않고 싸워 이겼다!
그러나 정작 포어벡은 나치스의 이러한 선동이 반갑지 않았다. 그가 비록 나치스의 표현대로 한번도 패하지 않은 독일군의 상징이며, 종전후 스파르타쿠스단을 진압하는데 앞장선 자유군단의 일원이었다지만, 그는 결코 나치스가 반갑지 않았다. 

그 힘겨운 전쟁동안 자신과 함게 싸워주었던 흑인병사들을 더러운 척결대상으로 보는 자들을 그가 과연 호의적으로 볼수있었을까?
아직 바이마르공화국이 붕괴되지 않았던 시절, 포어벡은 의회에서 활동하며, 나치스를 막기위해 힘썻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힘이 부첬다. 결국 나치스가 집권하고 전쟁이 시작되었을때, 히틀러는 군대에 복귀시켰다. 어차피 60넘은 노인을 전장으로 몰아갈순 없으니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2차대전은 포어벡의 삶을 파괴했다. 폭격은 그의 집을 파괴했고, 폴란드와 프랑스에서의 전투 도중, 그의 두아들이 전사했다. 종전후 그는 먹고 살길 마저 막막해졌다.

그를 살린것은 그의 영국인친구들이었다. 스머츠등, 한때 그의 적이었던 영국군들은 포어벡에 식량과 집을 마련해주었다. 한때 그들이 포어벡의 포로가 되었을대 대접받았던 것처럼. 그의 비참할뻔한 말년은 한때의 적들로인해 구원받은것이다.

1964년, 포어벡이 사망한후, 독일의회는 생존해있는 아스카리병사들에게 생계지원금을 보내는 안을 통과시켰다. 포어벡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오랜 전우들에게 선물을 남기고 떠났다.

by Cicero | 2008/05/12 16:40 | side of history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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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VP at 2008/05/14 11:34
그러게 전쟁에서의 지휘관의 최대 필수요소는 인덕이라니깐...인종주의자가 저자리에 들어앉았더라면 '어제의 전우' 흑인들을 까고도 남았을터...

※뱀다리 : 그나저나 포어벡 초상화(사진?)를 보니 우째 미군 남부군 장교 스타일 같구려..모자때문인가...???
Commented by Cicero at 2008/05/16 13:56
부니햇은 더운지방에서는 잘쓰는 모자니까. 그것때문에 비슷해보일수도 있지.
Commented by movie at 2008/05/21 13:21
지휘관의 미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네...가장 큰 재산은 사람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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