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24일
우크라이나 파르티잔의 전설-시디르 코박(sydir kovpak)
독소전이 벌어진 이후, 전쟁 종결까지150만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파르티잔운동에 가담했다고 추산되고 있다. 이들의 활약으로 120만의 독일군과 그동맹군들이 동부전선후방에 투입되었고, 그중 46만여명이 전사했고, 독일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최소 200만의 우크라이나인들을 살해하거나 강제 수용소로 끌고 갔다.-그러고보니 최근에 유대인못지않게 나치스가 집중학살한게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주장도 있더라. 동부전선은 붉은 군대와 독일군이 격돌하는 주전선못지 않게, 후방에서의 파르티잔들의 전투도 격렬했던 것이다.

<이 양반이 바로 시디르 코박>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게 되자, 우크라이나는 전쟁의 참상과 나치스의 인종정책, 그리고 거기에 편승한 우크라이나 친나치세력의 만행으로 피페화 되었다. 코박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 다시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엔 수미지역에서 조그만 게릴라그룹을 이끌고 독일군과 우크라이나협력자들을 기습했다. 그러다 점점 그의 활약이 알려지면서 여러개의 소규모그룹들을 병합해, 우크라이나최대규모의 파르티잔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코박의 파르티잔부대의 여군들>
스탈린도 한때 자신이 죽이려했던 이 백전노장의 활약을 인정하지 않을수없었다. 1942년, 코박은 그동안의 활약을 인정받아 영웅훈장을 수여 받았다. 코박의 세력과 활약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갔고, 동부점령지의 가우라이터들과 독일장교들은 밤에 코박이 어딜 다녀갔는지 확인하는게 일과의 시작이 되버렸다. 코박의 출현이 잦은 도로변에는 파르티잔이 세웠는지, 독일군이 세웠는지 모를 Achtung! Kowpak!(코박 주의) 표지가 서있게 되었다. 이제 코박이 출몰하는 지역은 우크라이나를 벗어나 구 발트3국, 동부 폴란드에까지 이르렀다.-좀 과장섞인 정보에 의하면 오스트프로이센지방(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지대)까지 뻗어나갔다는데 그건 구라같고.
그세력범위도 범위지만 코박의 게릴라들은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독일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결국 1943년, 독일은 코박을 제거하기위한 대규모공세를 펼친다. 독일은 코박의 오른팔인 세미욘 루드네프의 제거까지 성공한다. 그러나 결국 최종목적이었던 코박의 제거는 실패해 오히려 우크라이나 빨치산들의 기세만 키워주고 말았다. 스탈린은 코박의 파르티잔들을 제1우크라이나 파르티잔사단으로 정석적으로 붉은 군대에 편입시키고, 코박을 그 지휘관에 임명했다. 이때 코박은 다시 한번 소련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1944년 공식적으로 붉은 군대지휘관이된 코박이 받은 임무는 루마니아와의 국경지대인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가서 퇴각중인 추축국군대를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루마니아라니! 코박의 근거지인 수미지역에서 루마니아국경까지는 결코 근거리가 아니었다. 스탈린은 반쯤은 이 백전노장을 엿먹일 생각이었던게 틀림없었다. 성공하면 좋은 일이고, 실패하면 그동안 보류되었던 숙청대상을 다시 리스트에 올리는 것 뿐이니까.


<上-카르파티아산맥인근 지도, 下-수미에서 루마니아국경지대까지, 멀면 멀었지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코박은 2,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2,500km거리를 주파해 독일군을 기습했다. 스탈린도 예상못했지만 독일군도 예상못한 기습이 성공한 것이다. 그렇잖아도 퇴각중이었던 독일군은 치명타를 입고 루마니아로 후퇴했다. 이렇게 다시 한번 코박은 게릴라전사(戰史)에 전설을 세겼다.종전후, 코박은 우크라이나소비에트의 고위간부가 되었다.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아직도 코박을 국가적영웅으로 기억하며 기리고 있다.

<키에프에 있는 코박 기념비>
# by | 2008/04/24 16:58 | side of history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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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줄기차게 주장하는 '게릴라전은 적 병력을 괴롭히기만 할 뿐, 결정적 승리에 도움되지 못한다'라는 것도 생각해 봐야할 일일 듯;;;;
결정적 한방은 아니지만 도움은 된다는..
근데 멋진 걸...그 먼 거리를 가서 승리한다라..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