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가황조라는 중국영화가 있다. 20세기 초반의 격변기에 손문의 정치적 동지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경제계거물인 공상희와 결혼한 애령, 혁명지도자 손문과 결혼한 경령, 떠오르는 신예 정치인 장개석과 결혼한 미령, 이세자매의 인생을 다룬 송가황조는 격변의 역사속에서의 자매였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송가황조, 개인적으로 중국 근현대사 다룬 영화중에 두번째로 재밌게 본 영화다.>
격변의 역사속에서 송씨 세자매의 이야기는, 특별히 예외적인 일은 아니다. 서로가 택한(혹은 강제화 된) 이념으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가족이나 친족, 이웃의 이야기는 한국전쟁이야기에서 단골 소재였고, 아버지가 친일파였음을 알고 갈등했던 친일인명사전편찬자의 이야기도 있으니 말이다.(시위현장에서 전경과 시위대로 만난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도 여기 포함될수있을 것이다.)
그런 드라마틱한 삶중에서 송씨 세자매와 꽤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미트포드가의 자매들 이야기다.
20세기초반, 영국의 귀족인 데이비드 베트럼 오길비 프리맨 미트포드 공작은 슬하에 6명의 딸과 1명의 아들을 두었다. 공작은 파시즘에 대한 옹호자였고 , 자식들과의 관계에선 무미건조한 방임주의자였다. 공작의 이러한 정치적입장과 자식들과의 관계는 훗날 자식들의 이념과 성격을 결정짖는게 크나큰 영향을 남겼었다.
미트포드가의 아이들은 런던교외의 귀족적인 집에서 성장했다. 큰집과 수많은 시종들, 학교도 다니지 않았고(아들인 토마스는 그래도 이튼으로 보내졌다.)부모는 그들을 방임했다. 구식적인 영국귀족적인 사고 방식대로라면, 그들은 신랑감 잘만나서 결혼하는게 집에서 기대하는 전부였으니, 그녀들에게는 나름 행복한 삶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이란게 싱글로 살라고 있는게 아닌 이상, 미트포드가의 딸들에게도 사랑이 다가왔다. 장녀였던 넨시를 비롯해 대부분의 딸들은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귀족들과 결혼했다.
셋째딸 다이애나 미트포드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애나는 1929년, 아일랜드귀족이자 작가인 브라이언 월터 기네스와 결혼했다. 다이애나와 월터, 두사람 모두 글쟁이로서의 재능이 있었고(미트포드가의 딸들은 대부분 작가로 이름을 남겼다.) 그재능을 충분히 살렸다. 그들 부부는 매년 2만 파운드의 거금을 벌어들였고, 그에 따라 수많은 유명인사들과 친교도 맺을수있었다. 그 유명인사들중에는 훗날 다이애나의 인생을 바꿔 놀 사람들이 있었다. 윈스턴 처칠과, 훗날 영국파시스트연합의 당수 오스왈드 모슬리였다.
다이애나와 모슬리, 두사람은 이념적으로도 동류였고 다이애나의 아버지 미트포드공작이 모슬리의 후원자였던 탓에 급속히 친해지기 시작했다. 모슬리와 다이애나의 관계는 결국 다이애나와 월터의 이혼을 불러왔다. 그러나 모슬리는 이혼하지 않았고 다이애나는 모슬리의 아내가 1933년 복막염으로 사망할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1933년, 다이애나는 19살된 동생, 유니티와 함께 독일을 방문해 뉘른베르크당대회에 참여했다. 줄지어선 갈색제복의 행렬, 펄럭이는 스와스티카깃발들,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한남자의 이름을 외치며, 그의 이상을 위해 움직였다. 유니티는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던 남자, 히틀러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그리고 유니티가 히틀러에게 호감을 가졌던 만큼, 히틀러 역시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다. 히틀러는 1935년과 36년, 연이어 그녀를 뉘른베르크당대회에서 자신의 손님자격으로 초대했다. 베를린 올림픽때는 유니티와 다이애나를 위해 벤츠를 배치하기도 했다. 두자매는 마그다 괴벨스와 함께 벤츠를 타고 올림픽경기를 구경다녔다.

<1937년 뉘른베르크에서 제시카와 유니티가 ss들과 찍은 사진.>
히틀러는 유니티를 '완벽한 아리아인여성'이라고까지 표현했고, 유니티는 독일의 반유대주의 신문 Der Stürmer 에 보낸 편지에서 "영국은 영국인들에게! 유대인을 몰아내자! 하일 히틀러!"라고 언급했다. SIS는 뮌휀에서 히틀러가 가는 어느곳에서든 그녀가 발견되었으며, '나치스보다 더 나치스같다'라고 보고했다. 심지어 그녀는 영국대사관무관에게도 나치식경례를 했다.(뮝미?)분노한 장성은 그녀의 여권을 압수할것을 요청했다.
1936년 10월 6일, 다이애나는 마침내 모슬리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들은 베를린에 있는 괴벨스의 저택에서 결혼했고 하객은 히틀러과 괴벨스뿐이었다. 히틀러는 이 새출발하는 연인들을 위해 자기가 직접 그린 그림을 은액자에 담아 선물했다.다이애나와 모슬리는 1938년 자신들의 첫아이인 알렉산더가 태어날때까지 자신들의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아마도 이시기가 다이애나와 유니티에게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것이다. 그러나 그행복도 끝나가고 있었다.2차대전의 발발이 다가온것이다.
전쟁위기가 가시화되자, 유니티는 히틀러에게 매달렸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에 따르면 "(사적인 자리에서)정치얘기를 하지 않는것은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러나 미드포트양만큼은 예외였다. 그녀는 집요하게 히틀러에게 영국과의 협상을 부탁했고 히틀러의 회의적인 '고려해보겠다'는 말에도 포기할줄 몰랐다."
제시카가 19살이 되던 해, -그녀의 언니였던 유니티가 독일에서 콧털화가에게 매료되었던 나이다.-그녀는 자신의 먼 사촌이자, 처칠의 "빨갱이조카" 에스몬드 로밀리를 만난다. 에스몬드는 스페인내전에 참전해 마드리드전투도중 발병한 이질을 치료하기위해 요양와있었다.

<제시카 미트포드 >
에스몬드와 제시카가 사랑에 빠지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이애나와 모슬리가 그랬고, 히틀러와 유니티가 그랬듯히. 둘은 함께 스페인으로 가기로 결심했고, 뉴스 크로니클의 분쟁취재기자신분으로 가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뒤, 제시카와 에스몬드는 결혼을 결심했지만 양집안의 극심한 반대에 부딧쳤다. 제시카는 미트포드가의 상속권을 포기하고 에스몬드가 함께 런던 이스트엔드의 슬럼단지에서 살았다. 그녀와 에스몬드는 거기서 첫딸, 줄리아를 낳았지만 유행성 홍역으로 3달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939년, 에스몬드와 제시카는 미국으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온갖 잡일을 마다하며 돈을 벌였다. 미국으로의 이민은 이들 부부에게 힘들지만 새로운 삶을 열어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전쟁은 그누구에게도 예외없이 불행을 가져왔다. 이들 부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2차대전이 발발한 후, 미트포드가는 충격에 휩싸였다. 미트포드공작은 파시스트에서 점잖은 보수당원으로 선회했다.
아버지 못지 않게 충실한 파시스트였던 공작의 아들, 토마스 미트포드는 독일과는 싸울수없지만, 일본과는 싸울수있다는 괴상한 주장을 내세웠고 덕분에 태평양전쟁에 배속받아 1943년 버마에서 전사했다.
미국에 살고 있던 제시카의 남편인 에스몬드는 캐나다공군에 자원입대해 영국으로 향했지만 1941년 11월 30일, 독일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
전쟁은 그렇게 미트포드가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비극으로 다가왔다.
유니티의 비참한 최후
그중에서 어찌보면 가장 불쌍한 건 유니티였다. 불과 얼마전까지 이전쟁을 일으킨 일당들과 가장 친하게 지냈던 그녀는 이 막장스러운 사태전개에서 정신차리지 못했다. 전쟁 발발 당시 독일에 머물고 있던 유니티는 9월 3일,히틀러에게 보내는 작별편지를 쓰고 뮌헨의 잉글리쉬 가든에서 히틀러에게 선물 받았다고 알려진 진주로 장식된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을 시도했다. 총알은 뇌에 박혀 심각한 타격이 되었지만 그녀를 죽이지는 못했다. 그녀는 스위스를 거쳐 영국으로 송환되었다. 유니티는 옥스포드샤이어에 있는 미트포드가의 영지에서 요양을 취했다. 미트포드공작은 딸을 살리기위해 수술을 염두했지만, 의사는 총알적출이 조금만 잘못되도 유니티는 죽고 만다며 만류했다. 결국 그녀는 1948년 33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다이애나,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
그녀의 파시스트 언니, 다이애나도 무사하지만은 못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모슬리부부의 파시스트적인 성격을 문제삼아 억류되었다. (2002년에 공개된 MI5의 문서에 따르면 MI5는 그녀를 남편 모슬리보다도 위험하고 교활하며 야망에 가득찬 인물로 보았다. 오토 스코르체니가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였다면 다이애나는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였던 샘이다.)1940년 6월 29일, 영국정부는 이들 부부를 반역혐의로 체포해 런던 할로웨이 교도소의 여성구역에 집어넣다.(체포 당시 그녀는 히틀러의 사진을 아기 침대밑에 감추려 하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 이들부부는 각각 남성구역과 여성구역에 결리되어 수감되어있었다. 당연한거였다. 그러나 처칠입장에선 이 귀족내외가 일반 수감자들과 동급으로 취급받는게 못 마땅했던 모양이다.(모슬리와 미트포드, 모두 처칠과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니 더더욱 그랬을것이다.)
1941년 12월, 교도소 당국은 이 한쌍의 바퀴벌레들과 다른 두쌍 죄수 커플들에게 부부가 동거할수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이들은 교도소인근의 오두막에 다른 죄수들과 격리되어 살았는데 아마도 병균같은 파시즘을 옮을것을 염려한 교도소 당국의 대책인것으로 보인다.
수감생활내내 다이애나는 전혀 위축되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상황에서도 사랑하는 님과 함께(...)라면 즐겁다는 분위기였다.
모슬리부부는 1943년11월, 모슬리의 건강악화를 이유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1947년까지 여권 발부가 거부되었다.
제시카, 미트포드의 붉은 양
전쟁후에도 살아남은 미트포드가 사람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제시카는 미국인 인권 변호사 로버트 에드워드 트레하프트를만나 1943년에 결혼했다. 두 부부는 훌륭한 인권운동가였다. 남부의 가장 깊은곳까지 내려가 아프리카계미국인들과 함께 바리케이트를 치고 백인 폭력단체의 공격을 막아내기도 했으며, 백인여성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쓴 아프리카계미국인 윌리 멕기의 구명운동을 펴기도했다.불행히도 멕기의 처형은 막아내지 못했지만.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을 멈출줄 몰랐고, 부부 모두 공산당원이면서 빨갱이사냥이 기승을 부리던 1953년 멕카시의 국회출석요구를 거절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1956년엔 소련이 뭔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됬다는 판단하에 탈당해 인권 운동에 매진했다.
그녀의 이런 활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부여했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랑도 제시카 미트포드가 자신의 우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제시카는 자식들에 관한 무관심만큼은 부모에게 그대로 물려받고 말았고, 자식들은 '자율적'이라는 이름의 어머니의 무관심하에 자랐다. 그의 아들은 그로인한 조울증으로 몇년간 고생해야 했다.
종전후의 모슬리 부부
한편 한쌍의 파시스트 바퀴벌레 모슬리부부는 전쟁이 끝나고 출국금지가 해제되자, 프랑스로 이주해 파리근교의 저택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 파시스트들과 비슷한 수준의 이웃들이 살고 있었다. 바로 몇년전까지 힛통이 왕관을 찾아줄꺼라 믿고 있던 볍진왕족 윈저공부처였다. 수준 비슷한 두 부부는 꽤 잘 어울려 놀았다.

모슬리부부는 이곳으로 이주한 뒤 다시 한번 결혼식을 치뤘다. 독일에서 결혼할 당시 결혼 보증인이었던 힛통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그가 가지고 있던 증빙서류는 전쟁통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 사는 동안 다이애나는 자신의 출자하고 있는 극우파잡지의 편집을 담당했고, 전쟁 이후 영향력을 거의 상실해 버린 영국 파시스트연합의 지지자가 되었다. 다이애나는 히틀러가 옳았다는 생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잘못에 관해서도 말하곤 했다.
다이애나와 제시카는 사상을 달리하고 각자의 길을 떠나면서 서로 한번도 만나지 않았고, 편지든 전화든 그 어떤 연락도 죽을때까지 취하지 않았다. 이 두 극단주의자 사이에서 장녀인 넨시가 편지를 통해 두사람의 끊어진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결국 다이애나는 2003년, 제시카는 1996년에 사망했고 죽고나서야 옥스포드샤이어의 가족묘지에서 만날수있었다.
유니티 발키리 미트포드는 정말 자살하려 했을까?
유니티를 둘러싼 음모론중에는 유니티가 자살한게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유니티는 비록 막장으로 치닫는 국제관계로 고민은 하고 있었으나, 히틀러에 대한 애정은 확고했으며, 전쟁이 벌어진다해도 계속 히틀러에게 영국과의 협상을 건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히믈러와 괴링등의 일부 나치스고관들에게 이 총통의 영국인 여자친구는 히통의 전쟁의지를 약화시킬 위험한 존재로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자살로 위장해 살해하려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음모에는 히틀러와 유니티 사이를 질투한 에바 브라운도 개입(...)했으며 1941년 헤스가 영국으로 간 진짜 이유는 유니티와 관련(유니티를 독일로 데려와 치료받게 하거나, 암살하기위한)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 음모론은 유니티가 히틀러의 자식을 가졌을지모른다는 추측이 붙으면서 더욱 세를 불렸다.
유니티, 히틀러의 아이를 임신하다?
2007년 12월, 뉴 스테이츠맨 메거진의 마틴 브라이트 기자는 2002년 자신이 옵저버지에서 일할 당시 발 헨이라는 이름의 여성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사로 올렸다. 발 헨에게는 옥스포드샤이어에서 산파 일을 하던 베티 노턴이라는 숙모가 있었는데, 숙모의 고객중에 한명이 유니티였으며, 헨의 어머니가 베티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유니티는 히틀러의 자식을 임신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덕에 영국에 히틀러의 자손이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난무했고, 옥스포드사이어의 무덤을 파해쳐서 유니티의 시신을 감식해봐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살아남은 마트포드가의 막내딸 데보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고 반박하느라 바빴다.
영국의 TV방송인 채널4는 이 음모론으로 다큐멘터리를 찍어 12월 20일에 방영하기도 했다.
어떤 주장에 따르면 베티 노턴이 미트포드가에서 일한 것과 유니티가 그 환자였던것은 사실이지만, 유니티는 임신한 게 아니라, 자살의 실패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상상 임신을한 것뿐이라고도 한다.
이쯤에서 한번 정리해 보자.
지금까지 히틀러의 자손이 살아있다는 주장은 수도 없이 많아 나왔다. 에바 브라운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브라질 커피농장주가 되었다는 이야기부터, 1차대전 참전 당시의 불장난으로 태어난 자식이 동독 공산당관료가 되었다는 주장, 마그다 괴벨스등 히틀러에게 열정을 바쳤던 부하관료들의 유혹으로 태어난 자식이 종전후 부랑아로 떠돌다가 죽었다는 주장까지 수도 없이 많다.
유니티의 경우도 이런 다양한 음모론 중 하나일뿐이다. 마틴 브라이트의 기사 자체가 "어느 할머니가 60년전에 우리 외숙모가 한 얘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카더라 통신격인 샘이다.
그래도 혹시 아나? 린드버그의 독일인 자식들 처럼, 어딘가의 히틀러의 영국인 자손이 살고 있을지? 살고 있어도 자기가 히틀러의 자식인지 모르거나, 알더라도 절대 입밖으로 못내고 살겠지만.





덧글
LVP 2008/02/18 03:14 # 답글
한집에서 상극성향의 인물이 둘씩이나 나오다니..저질이다....저집안은 저질이야!!!!;;;;;※1.2.3 통합 덧글;;;
Cicero 2008/02/19 08:46 # 답글
뭐 복잡한 시대상황의 반증이라고 봐야겠지.
movie 2008/05/21 15:17 # 삭제 답글
무서운 자매들...모든지 열정적이네. 사랑에 빠지는 것도...이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