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에 이미 독일의 패배를 결정 지은 어떤 이유-오슬로 리포트

1939년, 11월, 노르웨이 주재 영국대사관 무관이던 헥터 보예스중령은 자기에게 온 우편물을 살펴보던 "어느 익명의 독일 과학자"로부터 온 두통의 편지를 발견한다. 독일이라!... 폴란드침공으로 적국이 된 국가의 과학자가 왜? 헥터중령은 두통의 우편물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살폈다. 한통은 단순히 종이 몇장이 들어간 두께였지만, 다른 한통은 뭔가 묵직한 것이 들어있었다.

폭발물일까? 헥터는 충분히 그럴수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헥터는 그런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섰고 두통의 우편물을 개봉했다. 그리고 헥터는 그안에서 폭발물보다 더 충격적인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7페이지로 정리된 독일군사과학의 지금까지의 연구결과가 앞으로의 연구예정에 관한 보고서였다. 그리고 묵직했던 물건은 폭탄이 아니라 독일이 개발한 근접신관의 프로토타입이었다!

독일의 JU88양산계획과 영국이 전쟁개시와 함께 제거해야할 주요군사연구시설, 그리고 독일의 신무기들과 그대응책들...
독일의 군사기술비밀들을 사정없이 노출시킨 이 보고서는 한가지 요청을 끝으로 마무리 되있었다.

"당신들이 이 우편물을 받았다면, 11월20일, BBC심야방송에 "헬로, 여기는 영국입니다." 대신 "헬로, 헬로, 여기는 영국입니다."라고 오프닝멘트를 변경해주시길 바랍니다."

헥터는 이것이 앞으로 전쟁의 방향마저 좌우할 물건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 우편물들을 급히 본국의 SIS에게 보냈다. 오슬로 리포트로 명명된 이 우편물을 받아본 SIS의 입장은 이랬다.

"이걸 믿어야 돼?"

그도 그럴것이 우편물에 기록된 정보는 터무니없을 정도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으니까. SIS는 이게 독일의 떡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경우에 따라선 이 우편물은 소각되던지 SIS의 창고 어딘가에 처박힐지도 몰랐다. 하지만 SIS의 이러한 의혹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SIS의 군사과학정보분석팀에 있던 젊은 물리학자 레지날드 빅터 존스였다.

<레지날드 빅터 존스 박사, 2차대전때는 파릇 파릇했다는데... 그시절 사진은 아쉽게도 없다.>


"몇몇 오류가 있지만 기록된 정보들이 대부분 세밀하고 구체적이다. 특히나 독일의 전자기술과 레이더기술에 관련된 부분은 전문가가 쓴것이 확실해 보인다...이정보는 독일의 떡밥이던가, 아니면 누가 목숨걸고 쓴거다. 난개인적으로 후자로 믿고 싶다."

결국 SIS는 레지날드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연합군은 독일의 신무기들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었고, 독일의 무기개발능력을 저하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리포트의 내용

7장이었던 원본은 전쟁이후 유실된 것을로 알려져있다. 대신 영국의 공립문서보관서에 그 사본이 보관중인데 남아 있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몇가지 내용들은 상당한 오류를 보이는데 이는 작성자가 간접적으로 취득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JU88양산-독일은 현재 한달에 5,000대 꼴로 융커스폭격기를 양산하고 있다.
1940년 3월이 되면 총 25,000대이상의 융커스폭격기를 보유하게 될것이다. 물론 1940년 서부전선개전 당시 25,000대의 융커스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上-독일의 다목적 폭격기 JU88, 下-일본의 모 게임소프트에서 손댄 JU88>


프랑켄-독일의 최초의 항공모함인 프랑켄이 킬 군항에서 건조중이다.
아마 그라프 제펄린의 이름을 잘못알았던 모양이다.

 

무선조종글라이더-루프트바페가 로켓추진식항공기를 무선으로 조종하는것에 대해 연구중이다. 폭격기의 조종사가 카메라영상을 보고 간단한 조작기구를 이용해 목표물까지 이 글라이더를 유도한다. 이 무기에 대한 연구시설은 페네뮌데에 있다.
대충 읽어보면 떠오르겠지만 지중해에서 처음으로 데뷔한 최초의 대함미사일로 불리는 하인켈293 얘기다. 리포트가 제공한 정보대로 RAF는 히드라작전이라는 고도의 낚시를 이용해 페네뮌데의 방공망을 무력화시킨뒤 철저히 파괴했다.

<Hs293 1943년 지중해에서 영국군 수송함을 격침하면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자동조종-위의 시스템을 로켓대신 항공기에 적용한 예인듯?

무선조종포탄-마지노선 공략을 위해 독일육군이 무선조종시스템을 탑재한 구경 800mm의 로켓추진식포탄의 개발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포탄이 너무 빨라 제대로 된 조종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결국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우회했다. 무기개발이 지연된 것이 마지노선 우회의 한 원인일수도?

레츨린-베를린 근교의 뮈리츠호수부근에 자리한 레츨린마을은 루프트바페의 연구시설이 있다.

공습경보체계-독일은 JU88에 레이더를 장착해 공습대비에 운영하려하고 있다. 이러한 레이더는 알루미늄 조각을 공중에 살포함으로서 무력화시킬수 있다.
영국이 윈도우, 미국이 체프라고 부른 그 방식이다.

근접신관-독일은 전자기장을 이용해 목표에 근접하면 터지는 근접신관을 개발했다. 이에 프로토타입도 우편물에 동봉했다.
연합군도 비슷한 걸 개발하고 있었고 이걸로 전쟁중에 독일보다 재미좀 많이 봤다.

이외에도 독일군의 신형어뢰, 폴란드전에서 선보인 독일군의 벙커 공략법등등이 리포트에 기록되어 있었다.
훗날 레지날드는 오슬로 리포트에 관해 이렇게 평했다.

"물론 우리는 오슬로리포트 이상으로 가치있는 정보들도 많이 확보했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것들이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 얻은것인데 반해, 오슬로리포트는 어떠한 희생자도 없이 우리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리포트의 작성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렇다면 오슬로 리포트의 작성자는 누구였을까?

리포트의 작성자는 바로 이사람, 지멘스그룹의 연구진이었던 한스 페르디난트 마이어박사였다. 폴란드전 개전이후인 1939년 10월 30일, 마이어박사는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 호텔에서 면장갑을 낀체 호텔 짐꾼으로부터 빌린 타자기를 이용해 이틀에 걸쳐 7페이지에 달하는 오슬로 리포트를 작성해 노르웨이주재 영국무관 헥터중령에게 보냈던 것이다.

<지멘스 홈피에서 긁어온 마이어박사의 사진>


그는 오슬로 리포트와는 별도로 덴마크의 닐스 호름브라트박사를 통해 자신의 오랜 영국친구인 헨리 콥덴 터너와 연락을 취하려고 시도했다. 닐스박사는 쾌히 이역할을 받아들였지만 1940년 3월, 히틀러가 덴마크마저 침공하면서 이 루트도 사실상 단절되고 만다. 마이어는 독일로 귀국한 뒤, 1943년 간첩혐의로 체포되어-덴마크에서 영국과의 연락망을 만들려한 죄였다.-종전때까지 집단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독일은 끝까지 오슬로 리포트가 있다는것도 몰랐다. 영국도 이걸 누가 작성했는지는 종전이후에도 몰랐다.
작성자인 마이어박사도 굳이 자신이 했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1977년에야 처음으로 자기 아내에게 얘기했을 정도니.

오슬로 리포트의 작성자가 밝혀진건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1953년 12월 15일, 항해중이던 퀸 메리호에서 마이어의 영국친구 헨리가 레지날드의 초대를 받아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저녁식사 도중 전쟁 당시 연합군에게 막대한 공헌을 해준 어느 문건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었고 헨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오슬로!"라고 외쳤다. 그리고 이어 헨리는 자신의 독일친구 마이어에 관해 얘기했다. 그가 개전초기 오슬로에서 어느 문건을 작성했으며 지멘스에서 일하면서 군사기술정보에 쉽게 접급할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헨리의 얘기를 듣고 레지날드는 연합군을 도운 "익명의 독일 과학자"가 바로 마이어임을 직갑했다.

이어 1955년, 드디어 레지날드와 마이어가 만나게 되었다. 뮌헨에서 열린 레이더기술에 관한 컨퍼런스에 만난 레지날드와 헨리, 마이어는 마이어의 자택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도중 레지날드는 자신이 전쟁 기간동안 SIS에서 일했음을 밝힌 뒤, 마이어에게 물었다.

"당신이 오슬로 리포트를 썻나요?"

마이어는 잠시 머뭇거린뒤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16년만에 배일에 쌓여있던 작성자가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두사람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서신을 교환했고, 레지날드는 마이어가 어떻게 서신을 작성했는지 구체적으로 알게되었다. 레지날드는 2차대전 당시 SIS에서 자신이 근무했던 경험을 책으로 쓰고자 했는데, 오슬로 리포트의 작성자의 신원을 공개하느냐 마느냐가 문제였다.

<레지날드가 쓴 Most secret war, 1978년 초판에선 공개못한 오슬로 리포트작성자의 신원이 1989년 개정판에서는 공개되었다.>

마이어 본인도 공개되길 바라지 않았던 탓에 레지날드는 결국 1978년 책을 출판하면서 리포트의 작성자신분을 숨겨야했다.
1980년 마이어가 사망하자, 레지날드는 1989년 개정판에서 리포트 작성자의 신원을 공개했다.

by Cicero | 2008/07/01 20:10 | side of history | 트랙백 | 덧글(2)

슬로바키아 봉기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에게 병합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언젠가 조국이 다시 독립할 날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독일과의 전쟁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당시 국제사회의 분위기탓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은 사실상 금기시 되었다. 하지만 1939년 9월, 결국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체코슬로비키아의 독립은 논의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1940년,구 체 코슬로바키아의 외무상이던 에드발트 베네스를 대통령으로 하는 체코슬로바키아 임시 정부가 런던에 수립, 대독선전포고를 하고 2차대전에 참전한다.
<에드발트 베네스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 망명정부 대통령>

2차대전에 참전한 이후, 에드발트를 비롯한 체코망명정부는 망국의 임시정부라면 누구나 꿈꾸는 "국내의 자생적 봉기에 의한 독립"을 어떻게든 실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점에 있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다른 추축국점령국보다 유리했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삼기면서 슬로바키아괴뢰국을 수립했고, 이 슬로바키아의 군대내부에는 사실상 독일괴뢰국인 현실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1943년, 에드발트는 이들과 다른 무장단체와 접선을 시도, 이들에게 무장 봉기를 호소했다. 에드발트의 이러한 호소는 슬로바키아내부의 세력들에게 호응을 얻었고,그해 크리스마스에 슬로바키아에 잔류해 대독일 투쟁을 지속하던 공산주의, 민족주의,군내부세력들의 결집인 슬로바키아국민회의를 결성, 대독일독립투쟁을 위한 연대, 에드발트의 런던망명정부의 권위인정, 그리고 종전후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의 재건이 결의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국내군의 얀 골리안장군. 봉기라는 상황덕에 중령에서 장군으로 고속승진했다>

이어 1944년 3월27일, 슬로바키아군의 얀 골리안 중령이 무장봉기 준비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얀은 자금과 무기와 탄약, 자금과 기타 물자들을 곧 있을 봉기를 위해 슬로바키아 중부와 동부의 군사기지들에 비축했다. 봉기의 주축이 되는 것은 슬로바키아국내군으로 불리는 약 3200명의 슬로바키아정규군병력과 기타 파르티잔그룹들이었다. 그러나 이들만으로 봉기를 성공시킬순 없었다. 봉기를 성공시키기위해선 외부의 협력이 필요했다. 에드발트는 연합군사령부와 모스크바를 오가며 지원을 약속받았다. 

1944년 여름이 되자, 독일의 동부전선은 슬로바키아근교까지 후퇴하기 시작했다. 6월 바그라티온작전을 개시한 소련군은 8월엔 슬로바키아동북쪽 국경에서 불과 40Km떨어진 크로스노에 도착했다.

슬로바키아까지 잃을순 없다! 바바롯사작전이전의 세력권은 물론 이젠 1939년 이전의 세력권까지 상실하게 된 독일군은 슬로바키아방어전을 준비했다. 독일군의 방위전략에 따라 슬로바키아군 2개 사단과 비행대가 슬로바키아북동쪽에 자리한 프레소프에 배치되어있었다. 이들은 잘무장되고 훈련되어있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국내군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다. 이들은 봉기가 시작되면 독일군의 등을 칠 계획이었다.

두 사단을 통솔하고 있던 빌리암 탈스키대령에게는 두가지 봉기 계획이 있었다.

하나는 코네프의 우크라이나 방면군의 도착에 맞춰, 이들이 통과할 통로린 두클라 패스(폴란드와 슬로바키아를 관통하는 카르파디아산맥의 산길)를 장악하던가

혹은 코네프가 도착하기 직전에 먼저 봉기를 시작해, 두클라 패스를 장악, 독일군과 싸우다 소련군의 도착을 기다린다였다.

골리안은 두번째 전략을 지지했고 탈스키는 봉기의 지도자인 그의 의지를 받아 들여 두번째 전략을 채택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루마니아가 추축국을 이탈, 연합군에 합류해버린것이다! 독일은 순식간에 완충지대를 상실했다. 독일은 슬로바키아에서의 방어전 준비를 더욱 강화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1944년 8월 28일, 독일은 슬로바키아를 '점령'했다. 

다음날 오후 7시, 슬로바키아국방장관 페르디난트 카틀로스는 슬로바키아가 독일에게 점령되었음을 라디오방송을 통해 알렸다. 체코슬로바키아국내군은 당황했다. 루마니아의 추축국이탈과 독일의 슬로바키아점령, 그어느것도 그들의 예정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들 이었다. 얀은 즉시 모든 국내군부대들에게 오후 8시를 기해 봉기하라는 암호 메세지를 보냈다. 그러나 급작스럽게 압당겨진 봉기가 제대로 진행될리는 없었다.많은 부대들이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우왕좌왕할수밖에 없었다.

봉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두클라 패스장악을 담당했던 탈스키 대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준비되지 않은 병력으로는 봉기가 성공할수없다고 판단, 다음날인 30일, 잘무장된 2개사단을 버리고 비행대와 함께 소련점령하의 폴란드로 날랐다.

지휘관이 도망간 2개사단은 혼돈에 빠졌고, 저항조차 하지 못한체  30일 오후 독일군에게 모두 무장해제당한뒤 독일본토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탈출해 파르티잔이나 국내군에 합류하기도 했고 또 일부는 집에 돌아갔다.

봉기는 그 첫시작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첫시작부터 핀트가 어긋나긴 했지만 골리안은 봉기를 계속 진행했다. 골리안과 체코국내군은 슬로바키아 중앙에 위치한 반스카 비스트리카에 사령부를 마련했다.  전투 한번 없이 두개사단말아먹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비관적인것만은 아니었다. 봉기를 시작했을때, 약 18000명에 불과했던 병력이 9월이 되자, 이곳저곳에서 합류한 병력으로 47000여명으로 불어났으며, 이를 바탕으로 슬로바키아의 중동부에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여기서 두개의 비행장을 장악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골리안은 중령에서 장군으로 진급했다.

슬로바키아인들뿐만 아니라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프랑스군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국내군에 합류해왔다. 당초 소련의 지시에만 따르던 파르티잔들도 유연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고 연합군의 지원도 시작됬다. 게릴라전과 연합군과의 연락 유지를 위해 SOE와 OSS의 요원들이 도착했으며10월 30일에는  미군이 B17도 보내왔다. 소련도 보급품을 공수하기 시작했다.

국내군에게 있어서 연합군의 지원, 특히 공군력 지원은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국내군은 봉기의 핵심이던 2개사단과 1개 비행대를 그냥 날려먹었으니 말이다. 공군력의 빈자리를 구식복엽기로 매워야 했던 그들에게 이런 지원은 가뭄뒤에 단비나 마찬가지였다.-여담이지만 같은 시기 유고의 파르티잔들은 스핏파이어와 수투카를 굴리고 살았다.
<체코슬로바키아 국내군의 아비아B534, 봉기당시에 국내군ㅇ에 투입되어 JU52 1기를 격추했다.>

물론 상황이 생각보다 좋아졌다고 해서 골리안은 결코 상황을 낙관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때, 우리는 독일군이 반격을 시작하면 잘해야 2주를 버틸수있다. 그때까지 소련이 두클라 패스를 통과해 오길 바랄뿐이다."

두클라 패스 전투

봉기가 일어나자, 독일은 브라티슬라바에 있는 조세프 티소의 괴뢰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고틀로브 베르거 상급대장이 이끄는 4만명의 친위대을 파견했다. 베르거는 우선 두클라 패스부터 정리했다. 그곳에서 그는 봉기군에 가담할 예정이었던 2개사단을 무장해제시키고 소련군을 위해 두클라 패스를 장악하려 했던 파르티잔들을 소탕했다.
<上-슬로바키아의 지도자, 조세트 티조-티토와는 무관한 인물이다.
下-티조의 얼굴을뜬 슬로바키아 건국5주년 기념주화.얄궂게도 건국 5주년에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독일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에드발트는 소련에게 약속했던 지원을 보내라고 촉구했고, 소련은 그해 8월초부터 시작된 바르샤바봉기에서 그들이 취한 태도에 대한 비난을 의식해서였는지 -혹은 코네프의 우크라이나방면군이 주코프에 비해 여유가 있었던지-비교적 그약속에 충실했다. 소련 항공기들은 국내군점령하의 해방구에 지원물자를 뿌렸다. 그러나 이러한 물자의 선점을 두고 국내군과 파르티잔은 항상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은 코네프의 후원과 지시를 받는 파르티잔쪽에게 물자가 집중되기 일수였다. 그리고 이덕분에 파르티잔보다 전투력이 높다고 평가받은 국내군의 약체화를 불렀다.

코네프는 물자적 지원외에도 실질적인 군사행동으로 슬로바키아봉기를 지원하기위해 나섰다. 1944년 9월 8일, 마침내 우크라이나방면군이 두클라 패스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점을 주코프가 바르샤바 봉기때 보였던 태도와 비교하여 코네프를 주코프보다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이반 코네프원수, 우크라이나 방면군 사령관. 터럭 하나없는 머리가 매력적이다.>

코네프는5일안에 두클라 패스의 요충지인 프레소프를 장악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작전을 개시했다. 국내군도 이에 호응해 두클라 패스 장악에 들어갔다. 예정보다 11일이 지났지만 봉기계획대로 움직인것이다. 소련군의 진격은 초기몇일동안은 순조로웠다. 비록 초반에 폴란드 영내의 크로스노장악에 시간 좀 잡아먹어서 5일안에 프레소프장악은 빠듯하고 무리로 보였지만, 어쨋든 '근시일내에 소련이 두클라 패스를 장악하고 슬로바키아를 해방시킬것이다.'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낙관론을 처절하게 부셔버릴 접전은 얼마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독일군은 브로산카와 마츠노브카마을이 자리한 534고지를 요새화하고 국내군과 소련군을 상대로 접전을 벌였다. 9월 10일부터 20일까지 전개된 이 전투는 무려 20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뀔만큼 치열했고 5일안에 프레소프장악이라는 코네프의 전략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결국 우크라이나 방면군이 두클라 패스를 빠져나온건 10월 6일이 되서였다.
<두클라 패스전투 기념관의 조형물>

코네프가 카르파디아 산맥에서 이렇게 애를 먹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 에드발트는 내부분열을 겪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국민회의를 재통합시키기위해 무단히 애를 쓰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기존의 국내군사령관 얀 골리안으로는 이들을 통솔할수 없다고 생각되었고, 루돌프 비스트 장군을 국내군사령관에 임명, 파견하고 골리안에게 부사령관을 맏게 했다. 이에 따라 10월 7일, 비스트장군이 국내군 사령관에 취임했지만 봉기세력들간의 내분은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9월 17일, 두대의 B17을 타고 OSS의 제임스 홀트 그린중위가, 다음날 SOE의 존 쉠머소령이 국내군이 장악한 해방구를 방문했다. 그들은 연합군최고사령부에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해결할 길 없는 분열과는 별개로 국내군은 10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 제 1군으로 재명명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한다는 대외적 선전이었다.

독일군의 반격

코네프가 534고지를 두고 골머리를 썩고 있던 9월 19일, 베르거 상급대장은 4개의 친위대 사단과 4개의 국방군사단, 그리고 1개의 슬로비카이괴뢰정부군을 포함하는 48000명의 병력을 이끄는 봉기진압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베르거는 쉽사리 군대를 움직이지 못했다. 봉기군은 6만명의 국내군과 18000명이라는 숫적우위를 확보하고 있었고, 봉기세력 뿐만 아니라 두클라패스를 타고 내려오는 소련군도 막아야 할 대상이었다.
<친위대 상급대장 고틀로브 베르거, 그는 훗날 포로들에 대한 가혹행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0월 17일부터 18일, 독일은 헝가리주둔 독일군 35000명을 슬로바키아로 재배치 시켰다. 호르티의 이탈을 막기위해서 부다페스트에 배치했던 이들이 호르티가 실각하고 괴뢰정권이 들어사자, 슬로바키아에 재배치된것이다. 10월이 지나기도 전에 이번엔 부다페스트근교에 붉은 군대가 모습을 드러낸걸 생각하면 제대로 오판한 샘이다. 하지만 어쩌라? 독일은 이미 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여유있는 병력운용이란 사치에 불과했다. 우선 급한 불부터 끄기 위해 이쪽 저쪽 끌려다니는 독일군. 그게 전쟁말기 독일군의 모습이었다.

병력이 증원된것과 함께 베르거에게는 또하나의 행운이 있었다. 스탈린이 체코슬로바키아보다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폴란드에 더 많은 관심을 둔것이다. 우크라이나 방면군의 적잖은 손실, 스탈린의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낮은 관심, 그리고 병력증파 베르거는 이제 수세에서 공세를 전환할 틈을 얻은 것이다.

10월 말, 베르거는 6개의 독일군사단과 1개의 슬로바키아군사단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다. 내분을 겪고 있던 봉기세력들은 손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 붕괴되기 시작했다. 10월 27일, 비스트와 봉기세력사령부는 그들의 본거지인 반스카 비스트리카에서 후퇴해야만 했다.10월 28일, 비스트는 런던 망명정부에 봉기가 실패했음을 알렸다. 이제 그들은 정규전을 포기하고 게릴라전에 전념해야 했다. 10월 30일, 슬로바키아의 괴뢰정부수장인 티소는 봉기를 진압한 독일군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훈장을 수여했다.

그후

체코슬로바키아봉기세력은 봉기실패후에도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독일은 파르티잔들에게 용서없었고, 아인자츠그루펜이 그 음침하고 소름끼치는 모습을 슬로바키아에서 드러냈다. 그들은 파르티잔에 협력했다고 판단되는 마을 93개를 불태웠고 수많은 인명을 학살했다. 오늘날 슬로바키아정부는 지금까지 211개의 학살무덤을 발견했으며 5304명의 유해를 발굴했으며 한망을에서 900명 가량 죽은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독일은 봉기에 대한 보복으로 93개의 리디체를 만든것이다.

11월 3일, 봉기의 지도자인 골리안과 비스트가 포론스키 브코벡 마을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심문받은뒤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 마지막으로 남아 구조요청을 보내던 SOE와 OSS대원들 독일군에게 체포되었다.

"연합군 코만도들은 그들이 무슨 옷을 입고 있던, 무슨임무를 띄고 있던, 혹은 그들이 항복을 했건 저항을 했건 포로로 잡지 마라!"

독일군은 그들의 총통이 내린 코만도오더를 충실히 따랐고 그에 따라 그곳에서 몇명에 대한 즉결처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살아남은 요원들은 집단수용소에 보내져 그곳에서 죽었다. 미군이 보냈던 B17도 대부분이 격추당했고, 살아돌아간 연합군병사들은 5명의 프랑스인 파르티잔뿐이라고 한다.

살아남은 저항세력의 게릴라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독일군의 압제와 93개의 리디체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해 프라하에서 다시 봉기가 일어났을때 그것은 독일과 독일계주민에 대한 잔인한 보복으로 돌아왔다. 이때 살해된 독일계주민은 약 5만명(2:0씨의 책에서는 30만이라는 주장이 나온다.)정도로 추산된다.
<독일군의 만행은 프라하봉기때 독일계주민에대한 보복으로 돌아왔다.>

코네프의 우크라이나 방면군은 두클라 패스를 통과하고도 그곳을 장악하기위해 전투를 지속했다. 소련군과 독일군은 도브라슬라바라는 마을에서 대규모접전을 벌였는데, 혹자는 이것을 제2의 쿠르스크라고 부를만큼 대규모의 치열한 접전이었다.우크라이나 방면군은 11월 25일에 두크라패스에서 마지막 독일군진지를 점령했다. 슬로바키아는 3월 4일에야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낼수있었다. 이어 체코는 5월 프라하봉기와 소련군의 도착으로 해방되었다.

슬로바키아의 괴뢰정부지도자인 조세프 티조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슬로바키아봉기에 대한 반역과 나치즘에 대한 협조가 혐의가 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집단수용소로 보내진 슬로바키아병사들을 살리기위해 노력했으며 독일군에게 협력함으로서 더이상의 파괴를 막을수있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사형이 언도되어 1947년 3월 1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에드발트는 이후, 소련을 믿지 않았다. 1945년 프라하봉기 당시 미군이 소련군보다 프라하에 가까이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쳤으니... 그는 해방이후 돌아와 체코슬로바키아대통령이 되었지만, 1948년 6월, 클레멘트 고트발트수상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같은해 11월 3일, 사망했다. 그는 자택 정원에 묻혔다.

여담이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이 독일에게 가졌던 악감정은 상상이상이었던 것 같다. 에드발트의 망명정부시절 발효된 대통령포고령에 의하면 체코슬로바키아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에 대한 재산몰수와 추방을 합법화시켜주고 있는데, 이게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고 한다.

<


<반스카 비스트리카에 있는 슬로바키아봉기기념관의 조형물>

by Cicero | 2008/06/25 12:35 | side of history | 트랙백 | 덧글(2)

What if the Axis had won World War 2? (추축국 승리 이후의 세계, 소설편)

예전에 DC인사이드 2차대전 겔러리에 올렸던 내용을 리뉴얼한 내용들.
이쪽계열에서 가장 유명한 로버트 해리스의 당신들의 조국(Fatherland)는 그 유명세탓에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국내출간작


높은 성의 사나이(The man in the high castle)
필립.K.딕

1. 미국은 루즈벨트가 암살되서 경제공황을 극복못하고, 영국은 처칠이 뻘짓만 반복해서 패하고 만다. 종전후 미국의 서부와 동부에는 일본과 독일의 괴뢰정권이 들어서고, 나머지 지역은 록키산맥연방과 독일에 우호적인 남부연방으로 분열된다.

2. 일본인들은 전쟁이전의 미국 '전통공예품'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며 남북전쟁모병포스터, 미키마우스시계, 초판 만화책부터 시작해서 애들 딱지와 우유병 병뚜껑까지 닥치는데로 모은다.

3. 독일은 지브롤터 해협을 봉쇄한뒤 지중해물을 증발시켜 농지화를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12억을 학살했고, 전세계적으로 노예제를 부활시켰다. 일본은 남미의 인디오들에게 주거공간을 만들어준다며 열대우림을 불태우고 아파트를 지었다. 미국각지에서 흑인노예를 보는것은 어렵지 않으며, 일본통치하의 서부에서는 중국인 인력거꾼을 보는것도 어렵지 않다.

4.독일은 로켓비행기를 여객기에 까지 실용화시켰다. 이 여객기는 유럽에서 미대륙까지 45분만에 도착한다. 또한 플라스틱사출성형에 관해 기술적우위를 독점해 세계 제일의 산업국의 자리를 굳혔다.

5.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숨긴체 살아가고 있다. 일부는 성형수술로 나치스가 말하는 '순수 아리아인'으로 위장해 SS나 기타 독일고위직에 침투하기도했다.
 
6.독일은 우주개발에 성공했다. 달에 우주인을 보내는데 성공했고, 화성개발계획도 착수되었다.

7.마르틴 보르만이 히틀러의 뒤를 이어 총통이되었다. 히틀러는 매독으로 인한 치매로 요양원에 있다. 보르만은 건강상의 문제로 사망하고 총통자리를 두고 하이드리히, 괴링, 괴벨스,자이스간의 암투가 벌어진다. 승자는 괴벨스다.

8.독일내에서는 '민들레작전'이라는 음모가 진행중이다. 이들의 계획은 자신들의 괴뢰국인 미국동부를 이용해 미대륙의 나머지국가들을 침공하고 일본내에 핵공격을 가한뒤, 일본의 해외영토를 a모두 빼앗는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계획은 외무성과 SS간의 암투의 결과로 일본정부에 유출된다. 외무성이 민들레작전이후에 습득한 해외영토의 통치권을 얻고, SS는 우주개발이후, 우주식민지에 대한 통치권을 얻은 까닭에 민들레작전에 전념해야할 필요를 못 느낀 SS가 고의로 유출시킨것이다.

9. 한소설작가가' 메뚜기 무겁게 가로 눕다'라는 소설을 썻다. 2차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한다는 대체역사소설이다. 독일점령하에서는 금서로 구분되었지만, 록키산맥연방에선 베스트셀러이며 서부지역에서 팔리고 있다.

역사가 바뀐건 이정도 이긴 한데 필립.K.딕이 살짝 오리엔탈리즘환자인지 일본인들은 시도때도 없이 고민거리있으면 주역으로 점치는 존재로 묘사된다. 더불어 서부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일본인들의 이런 습관에 전염된 상태. 소설자체가 긴박감같은건 기대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쓴 사람이 SF소설의 본좌 고 필립옹이다보니 그럭저럭 볼만.

히틀러 캡슐(SS-GB)
렌 데이트

1.시 라이온작전의 성공으로 독일은 영국을 지배하고 있다. 처칠은 종전후 형장의 이슬로 살라졌다. 미국은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1940년대 초중반, 이미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영국 레지스탕스들은 여전히 숨어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2.히틀러와 스탈린의 야합은 여전히 굳건하다. 하이드파크에 있는 맑스의 묘도 소련으로 이전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이전행사 당일, 폭탄테러가 발생해, 맑스의 유체는 산산조각나고 행사장에 있던 몰로도프등 소련과 독일의 고관들도 부상을 입었다.

하도 어렸을때 봤던 소설.중딩때던가로 기억. 소설구성자체는 파더랜드와 유사한걸로 기억된다.

미출간작

The sound of his horn
존 월

나치스가 전세계를 정복하는데 성공, 유대인들은 완전히 멸종해버렸다. 할일 없는 나치스는 자신들의 점령지에서 사람사냥을 하면서 논다.

The iron dream
노먼 스핀래드

이 소설은 앞서의 작품과는 좀 다른데, 추축국 승리 이후의 시계가 아니라, '히틀러가 다른 직업을 택했다면?'이라는 가정의 세계다. 소설속에서 히틀러는 B급 SF소설작가인데, 그는 소설속의 소설로 그의 필생의 걸작, The lord of swastika를 쓴다. 기나긴 유배끝에 돌아온 왕이 과거의 핵전쟁으로  생긴 흉측한 돌연변이들이 바글돼는 변방의 야만족을 물리치고 유전적으로 순수하고 건강한 천년왕국을 건설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인데, 본사람들 말로는 엑션묘사는 제번 재미있는데 , 스토리전개는 이뭐병...

소설속의 평론가 호머위플은 이 히틀러의 필생의 작을 두고,
"작중에 나오는 메스꺼운 이데올로기는 절대로 현실에선 실현될수없다."고 평한다.

The Two Dooms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일하는 물리학자가 주인공으로, 원자탄 개발에 회의를 느끼던 중, 우연히 인디언 환각제를 과용해서 180년 후의 미국이 일본에 상륙해서 소모전을 벌이는 동안, 알프스 요새에 숨어있던 괴벨스가 뒷통수를 쳐서 추축국이 이긴 새상으로 가게된다.
 
 일본은  미국에다 아시아의 많은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켜서 모국어와 문화를 금지시키고, 지배민족의 언어인 일본어도 금지시켜 강제로 영어만 쓰게 만들고, 봉건제를 부활시켜 마을마다 사무라이가 통치한다. 독일은 나치당 초기에 히틀러가 괴벨스에 의해 숙청되서 훨씬 효율적인 당이 되었는데, 조금만 수상해도 바로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체제입이다. 주인공은 여러 차례 죽을 고생을 한 끝에 인디언 환각제를 입수해서 원래 세계로 돌아와서는 한점의 의심도 없이 보람차게 원폭 개발에 전심전력으로 노력한다


대충 아는 범위에서 추스린 결과가 이정도?
혹시 이외에도 정보있으시면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by Cicero | 2008/06/22 12:04 | if의 역사 | 트랙백 | 덧글(2)

마오이스트? 그러는 너는?

한나라당 주성영의원이 멋지게 한건했다. 다음 아고라를 두고 '디지털 마오이즘이 판치는 토론방'이란다.
우선 주성영의원이 중국식 사회주의인 마오이즘의 기초이론이 뭔지나 알고 저러는지, 아고라내에서 얼마나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존재하느냐는  제처두고 대충 중국 문화혁명의 홍위병정도를 떠올리며 그렇게 칭했다고 보도록 하자.



주성영의원이 염려하는데로 솔직히 인터넷 여론은 현재 타자에 대한 매도의 성격이 분명 존재한다. 촛불집회, 미국산쇠고기반대에 관해 다른 형태의 의견을 내기란 쉽지 않다.다르다는 것은 공격의 대상이 되니까. 의심나면 메이저급 포탈 사이트에서 뉴스에 달린 리플이나 토론방에 가보시길. 중도적인, 온건적 설득의 목소리가 들어갈 자리는 좁다. 집회지지자와 알바, 그사이에 중도가 들어갈 틈은 별로 넓지않다. 필자도 예전에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 공급하고 싶으면 미국말고 호주에서 대량수입하면 될거 아니냐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가 '한우 농가 까지마라. 알바 새퀴야.'라는 댓글만 얻었다. 참고로 필자는 작년에 광우병투쟁에 종사했던 사람이다. 오해 없기를.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시민들의 움직임이 홍위병으로 매도 당해도 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글쎄올시다? 우리가 언제 보수언론사 본사를 습격해 기기를 파손시키고 죽창으로 위협해, 기자들 목에 "나는 찌라시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는 피켓을 걸고 서울시내 한복판을 행진한적이 있나? 아니면 우리가 한나라당당사와 국회를 습격해 국회의원들을 끌어내 광롸문 네거리에서 인민재판을 열어서 목을 매달기를 했나?조선일보에 계속 광고대는 농심을 습격해서 불을 내기라도 했나?
사레가 있으면 얘기해달라.
<우리가 조중동기자나 한나라당 국회의원, 혹은 외통부나 농림부 고위 공무원을 붙잡고 이러기라도 했냐 이거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보수언론들의 왜곡보도에 항의해 광고주들에게 공고중단을 권고하고, 온오프라인의 합법적인 장에서 토론을 하고 촛불을 들고 집회를 했을뿐이다. 그와중에 우리와 생각이 틀린 사람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게 그렇게 잘못됬냐 이거다. 뭣보다 우리를 마오이스트, 홍위병으로 부르기엔 홍위병이 가졌된 최고의 장점, 그들의 배후에 그들의 영도자인 중국의 최고 권력자모택동이 있었고, 그의 말과 사상이 그들의 행동근거가 되었으며, 그들이 하는 무슨 일이든 군경의 협조하에 이루어졌다는것을 생각해볼때, 별로 홍위병이나 마오이스트라는 말은 촛불집회에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경찰에게 집회를 파괴당했으며, 더군다나 모택동같이 우리를 후원해줄 사상가나 권력자도 없다.

<오히려 홍위병에 가까운건 이쪽이 아닌가? 그들에게 비호의적인 방송국에 들어가 집기파괴하고 점거하려든 보수단체회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마오이즘이니, 홍위병이니 하는 주장을 내논다면 글쎄? 아마 고전적인 중국의 홍위병같은 형태의 마오이스트로 몰기에는 너무나도 무리가 많다. 그러나 지극한 차이점때문에 연관성을 찾기 힘든 중국의 문혁당시의 마오이스트들 대신에 다른 마오이스트분파를 놓고 비교해본가면 어떨까?

그래. 가령 네팔의 마오이스트연합같은 친구들 말이다. 오랜 왕정독재에 대항해 민중의 귄리를 지키기위해 싸워왔고, 드디어 당당하게 총선에 승리해 집권당이 된 그친구들과 동일선상에서 우리를 마오이스트라고 불렀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다만, 나는 그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이겠다.
<오랜 투쟁끝에 민중의 해방을 쟁취한 네팔의 마오이스트연합, 이들을 보면 마오이스트란 호칭도 과히 나쁘지 않게 여겨진다.>

 자, 그럼 여기서 잠시 눈을 주성영 의원에게 돌려보자. 우리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한 촛불집회의 정의를 내려주기 위해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시는 주성영의원. 그분은 뭐라고 정의내릴수있을까?  다음 기사를 참고해서 추론해보자.

주 의원은 또 문제의 발언이 나온 19일 밤 MBC '100분토론' 출연 이후 자신의 홈페이지가 마비되고 미니홈피, 블로그 등에 네티즌들의 비난 글이 쏟아진 것도 "정상이 아니다. (그런 반응은) 다 예상했다"고 밝혔다.

그는 다음 아고라를 '디지털 마오이즘'이라고 표현한 생각은 "변함이 없다"며 "얘기를 더 해야 되는데 시간이 없어 못한 것이다. 추가적인 토론을 통해 인터넷 실명제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이분은 욕먹을 줄 알면서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라는 이야기신데...
뭐라고 정의내려 드려야 되나?
이분은 욕먹기를 즐기시니까,모욕 혹은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쾌감을 느끼는 메저키스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어떻게든 저렇게 남들의 시선과 관심을 끌기위해 부단히 노력하시는걸 보니 문하우젠증후군이 아닌가싶기도 하다.

<마조히즘은 고통을 쾌락으로 느끼는 정신상태를 말한다.>

<문하우젠증후군은 소설 문하우젠남작의 모험에서 유래된 병명으로 남들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 과대망상증과 허풍을 즐기는 증세를 말한다. 이병에 걸린 간호사나 간병인, 보육인이 관심을 끌기위해 환자와 아이를 해치는 경우가 있어 의료업 종사자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검사의 대상이라고 한다.덤으로 정치계 인사일수록 이병의 환자일 가능성이 높다나?>

여러분들이 보시기엔 주성영의원은 어느쪽 디지털-이단어 좋아하시는거 같으니-마조히스트? 아니면 디지털 문하우젠 증후군?

by Cicero | 2008/06/21 16:33 | 정치 | 트랙백 | 덧글(2)

거리의 싸우는 민중들을 위하여! venceremos!


칠레의 가수, 빅토르 하라는 선거로 집권한 맑시스트정권, 아옌데 정권의 지지자였다.

미국과 네슬레등 다국적기업의 사주를 받은 피노체트 일당의 쿠데타가 일어난지 3일째인 9월 14일 쿠데타군은 에스타디오 스타디움에 아옌데의 지지자들과 함께 하라를 감금했다. 하라는 기타를 집어들고 인민연합 찬가 Venceremos(승리하리라)를 부르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화를 내며 기타를 빼앗았다. 하라는 손뼉을 치며 노래를 계속했다. 군인들이 소총 개머리판으로 그의 두 팔을 짓이겼다. 하라는 그래도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려 했다. 군인들이 수십 발의 총탄을 그의 등에 박았다. 자유와 민중 그리고 그의 조국 칠레를 사랑했던 칠레의 민중가수 하라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venceremos! venceremos!
승리하리라! 승리하리라!


몇주째 계속되는 촛불집회에 참가하는 동안, 빅토르 하라의 venceremos가 머리속에서 메아리 쳤다.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대규모국민들의 저항과 앞뒤가리지 않는 국가의 탄압.

그동안 봐야만 했던 수많은 민중의 패배를 목격했던 탓일까?
이싸움에서도 패배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
정부가 어물쩡 어물쩡 넘겨버리고 냄비가 식듯 국민들이 잊어비리는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
그 모든 생각들이 집회에 참석하고 바라보는 나를 불안케 했다.

그러나 아직 대한민국은 살만한 나라인 모양이다.
민중은 후퇴하지 않았다.
막히면 돌아갈 지언정 좌절하지 않았다.
피비린내나는 폭력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거짓과 기만에 속지 않고 진실된 의지를 관철시키기위해 분연히 싸우고 있다.

물론 이번 장관고시연기등 이명박정부의 연막과 기만전술앞에 국민들은 또 속아 넘어갈지도 모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집회군중들은 해산되고, 이날의 분노를 잊은체 습관적으로 한나라당에게 다시 표를 주고 이명박을 지지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지금 이순간만큼은 민중의 의지가 굳건히 서있다.
쏟아지는 장대비속에서도 이나라의 민중들은 정의를 위해 행진한다.
서슬퍼런 국가폭력의 위협앞에서도 당당히 행진한다.
또 속고 기만당할지 모르지만, 지금 이순간만큼은 그들의 의지를 믿는다.

이 짧은 영상을 거리의 싸우는 민중들을 위해 바친다.

민중이여! 승리하라!
venceremos! venceremos!


by Cicero | 2008/06/04 00:02 | 정치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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